긴급수혈을 받은 한진그룹은 대한항공 경영정상화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항공업을 제외한 주력 계열사 매각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권 분쟁을 끝낸다면 확고한 지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대한항공에 1조2000억원 규모 유동성을 공급한다. 2000억원은 운영자금으로 쓰이며 자산유동화증권(ABS)과 영구전환사채(CB)를 각각 7000억원, 3000억원 인수하는데 사용된다. 하반기 만기가 도래하는 2000억원 규모 회사채 인수는 별도다. 총 1조4000억원을 지원하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22일 40조원 규모 기간산업안정기금 조성 대책을 내놨다. 국회 통과까지 시간이 걸리는 만큼 국책은행들이 선제적 지원에 나선 것이다. 그만큼 대한항공 현 사정은 녹록치 않다는 뜻이다.
대한항공은 자금 지원을 대가로 자체 자본확충와 경영개선 노력을 요구받았다. 고용안정, 고액연봉·배당·자사주 취득 제한과 기업 정상화에 주력해야 한다.
현재 한진그룹 차원에서 거론되고 있는 유동성 확보 방안은 1조원 규모 유상증자, 송현동 부지 매각 등이다. 더 나아가 지난해 조원태 회장이 언급한 '항공운송과 관련이 없는 사업' 등을 영위하고 있는 주력 계열사도 매각 대상으로 거론된다.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은 대한항공을 제외한 중간 지주사 격인 ㈜한진(육상운송, 부동산 관리), 칼호텔네트워크(호텔), 정석기업(부동산 관리), 진에어(저가항공사)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조 회장 발언을 감안하면 대한항공과 진에어를 제외한 계열사 대부분이 매각 대상이다.
한진칼과 특수관계인 등은 대한항공 지분 33.36%(한진칼 30%)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1조원 유상증자를 고려하면 약 3000억원이 필요하다. 지난해 말 기준 한진칼 현금성자산은 1412억원(별도 기준 523억원)에 불과하다.
대한항공이 유상증자에 성공해도 항공업 개선 시기가 불투명하다는 점이 문제다.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한 만큼 한진칼은 최악 상황을 고려해 최대한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 연간 금융비용만 5000억~6000억원에 달해 부채 규모를 줄이는 것은 필수다. 이는 현금성자산(2019년 말 기준 8163억원)도 압박하는 수준이다. 한 해만 영업을 못해도 유증을 통해 들어온 자본조차 무의미해질 수 있다.
이번 국책은행 지원 방안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영구CB다. 영구채는 채권 일종이지만 영구CB는 영구채와 주식으로 전환이 가능한 CB가 합쳐진 형태다. 투자 주체는 해당 CB가 행사가 이상으로 주가가 오르면 전환권을 행사해 차익을 누릴 수 있다. 반면 주가가 행사가보다 낮은 수준에 있다면 주식으로 전환하지 않고 채권으로 보유하며 이자를 지급받는다. 다만 이러한 조건이 붙어있어 일반 회사채 대비 금리는 낮게 설정된다.
국책은행들이 단순 영구채가 아닌 영구CB를 인수한데는 경영정상화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산업은행은 금호석유화학 CB 2000억원 중 1700억원을 인수했다. 주가가 오르면서 평가이익 규모도 크게 상승했으나 최종적으로는 2배가량 차익을 거뒀다.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영구CB 인수도 매각을 확신한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다양한 각도로 자금회수 방안을 고려한 셈이다.
대한항공 영구CB 인수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암묵적으로 대한항공은 물론 한진그룹 경영과 지배구조개선을 요구한 셈이다. 조 회장이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진행한다면 한진칼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 종식과 함께 ‘뉴 리더’로서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다.
한 자산운용사 운용역은 “국책은행들이 왜 영구채가 아닌 영구CB를 인수했는지 한진그룹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낮은 이자, 회계상 자본 인정 등은 임시방편일 뿐 본질적으로는 경영정상화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그룹 내 경영권 다툼은 소모적일뿐 위기 극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