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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다시 서로 바라보는 한국과 중국
이재명 대통령이 오는 1월4일부터 7일까지 경제인 200여 명과 함께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라는 소식은 단순한 외교 일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오랜 시간 냉각돼 있던 한중 관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양국 관계는 말 그대로 ‘필요하지만 불편한 관계’였다. 정치적 신뢰는 약해졌고 경제 협력은 관성에 의존했으며, 민간 교류는 위축됐다. 그러나 지난해 중국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비자 면제 조치를 시행한 데 이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강이 완전히 녹았다고 말하기는 이르지만 최소한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볼 수 있는 ‘회빙기(回氷期)’에 들어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외교는 늘 타이밍의 예술이다. 지금의 중국 방문 계획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겠다는 한국 정부의 판단이 반영된 결과다.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다. 수출과 수입, 투자와 공급망, 관광과 유학생에 이르기까지 양국 경제는 깊게 얽혀 있다. 정치적 기류가 아무리 냉랭해져도 경제의 현실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다만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얽혀는 있으나 대화하지 않는 관계’에 가까웠다. 비자 면제 조치는 이 정체된 흐름을 민간 차원에서 먼저 흔들었다. 중국을 찾는 한국인의 발길이 늘었고 전시회·상담회·학술 교류가 서서히 살아났다. 외교가 먼저 길을 열기보다 민간 교류가 틈을 만들어낸 셈이다. 시진핑 주석의 APEC 방한은 이 틈을 제도적·외교적 공간으로 넓힌 계기였다. 이 대통령의 방중에 경제인 200여 명이 동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선언 위주의 외교가 아니라 현장에서 성과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바이오, 콘텐츠, 친환경 산업 등은 경쟁과 협력이 교차하는 분야다. 이 영역에서 중국을 배제할 수도 무작정 끌어안을 수도 없는 것이 한국 경제의 현실이다. 주목할 점은 이번 방문에서 경제 협력뿐 아니라 국방·안보 협력 논의 가능성도 거론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경제 사절단 방문을 넘어 한중 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관리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냉정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회빙기는 얼음이 녹는 시기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발을 잘못 디디면 빠져들기 쉽다. 중국의 태도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중국은 분명 우호적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략의 변화라기보다는 전술적 조정에 가깝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중 전략 경쟁 구도 속에서 중국은 한국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을 전적으로 신뢰하거나 핵심 이익을 양보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경제 협력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은 선택적으로 문을 열고 선택적으로 닫는다. 필요한 분야에서는 협력을 강조하지만 기술 주권이나 안보와 직결된 영역에서는 여전히 높은 장벽을 유지한다. 국방 협력 논의 역시 상징적 수준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 우리는 한중 관계를 지나치게 정치적 낙관에 맡겼다가 예상치 못한 충격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 경험은 ‘중국과의 관계는 좋아질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번 방중 역시 성과를 기대하되 과도한 의미 부여는 피해야 한다. 이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필요하다. 그리고 늦지 않았다. 단절보다는 관리가 낫고 오해보다는 대화가 낫다. 한국 경제가 직면한 구조적 어려움을 고려할 때, 중국과의 협력 공간을 무작정 좁히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방문의 성공 여부는 화려한 성명이나 숫자로 드러나는 계약 규모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방식이다. 감정이 아닌 이해관계, 선언이 아닌 실행, 단기 성과가 아닌 지속 가능성에 기반한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회빙기는 지나간다. 강은 다시 흐르거나 다시 얼어붙는다. 어느 쪽이 될지는 우리의 선택과 태도에 달려 있다. 중국을 다시 찾는 지금, 한국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성숙한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기대는 절제하고, 경계는 유지하되 대화의 문은 열어두는 것. 그것이 지금 한중 관계에 요구되는 상식이며 국가 외교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균형이다.
2025-12-30 17: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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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여야를 넘는 인사, 진보의 후퇴가 아니라 성숙이다
진보 정권에서 보수 출신 인사를 등용할 때마다 반복되는 질문이 있다. “왜 굳이 그 사람인가.” “개혁을 위해 우리 편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질문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 현대 정치에서 진보 진영은 늘 ‘개혁의 주체’였고, 동시에 ‘기득권과의 싸움’을 숙명처럼 떠안아 왔기 때문이다. 인사는 곧 권력의 배분이며, 개혁 동력의 원천이라는 인식도 깊이 뿌리내려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인사 정책은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엇갈린 반응을 낳고 있다. 지난 정부 인사 일부를 유임한 데 이어, 신규 예산 관련 핵심 직책 후보로 이혜훈 전 의원, 김성식 전 의원 등 보수 진영 출신 인사들을 지명 또는 임명한데 대해 “개혁의 색이 옅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인사 흐름을 단순히 ‘타협’이나 ‘후퇴’로 해석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놓칠 위험이 있다. 오히려 이재명 대통령의 인사 기조는 진보 정치가 한 단계 성숙하는 과정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진보의 목표는 특정 진영의 장기 집권이 아니라, 사회를 더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 역시 시대에 따라 진화해야 한다. 한국 진보 정치의 지난 성취는 분명하다. 권위주의 체제를 넘어 민주주의를 제도화했고, 복지와 노동, 공정이라는 의제를 공론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도 분명했다. 정권 교체가 곧 ‘전면 부정’으로 이어지면서 정책의 연속성이 약화됐고, 공직 사회는 늘 정치적 충성도에 흔들렸다. 개혁을 외치면서도 국정 운영의 안정성은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대통령의 최근 인사는 이러한 진보 정치의 딜레마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볼 수 있다. 즉, 개혁의 방향은 유지하되, 집행의 방식은 넓히는 것이다.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이지만, 동시에 대한민국 전체의 대통령이다. 국가 운영은 선거 캠프의 연장이 아니라, 수천만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행정의 영역이다. 특히 재정과 예산 정책은 이념적 순수성보다 전문성과 균형 감각이 중요한 분야다. 재정은 복지 확대의 수단이자, 동시에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이다. 진보 정부가 재정을 무기로 삼으려면, 그만큼 재정 운용의 신뢰도 역시 확보해야 한다. 보수 진영에서 정책 경험을 쌓아온 인사를 기용하는 선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는 보수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진보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진보 측에서 가장 우려하는 지점은 이것일 것이다. “보수 인사를 쓰다 보면 개혁이 희석되지 않을까.” 그러나 인사의 출신과 정책의 방향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구였느냐’가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하느냐’다. 개혁 정부의 기준은 인사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성과와 책임성에 있어야 한다. 고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통찰을 찾을 수 있다. 맹자는 군주의 덕목으로 “백성에게 이로운가 아닌가”를 최우선 기준으로 삼았다. 어느 편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한 ‘정명(正名)’ 역시 직함에 맞는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진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사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역할에 맞는 사람을 쓰는 것이다. 서양 정치사에서도 진보적 개혁은 종종 통합적 인사를 통해 완성됐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이라는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재정과 금융 분야에서는 보수적 전문가들의 조언을 적극 활용했다. 그 결과 개혁은 이념 논쟁을 넘어 제도로 정착될 수 있었다. 링컨의 ‘라이벌 팀’ 역시 마찬가지다.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그는 반대파를 배제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지금 심각한 정치적 피로 상태에 놓여 있다. 진영 간 대립은 일상화됐고, 정치에 대한 불신은 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 정부가 또다시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구도를 반복한다면, 개혁의 정당성은 오히려 약화될 수 있다. 통합적 인사는 진보가 스스로의 도덕적 우위를 증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의 인사 정책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야를 가리지 않는 등용은 보수를 끌어안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라기보다, 진보 정부가 더 이상 진영 정치에 갇히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이는 진보의 후퇴가 아니라, 자신감의 표현이다. 자기 철학이 분명할수록, 타인의 전문성을 활용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 물론 조건은 분명하다. 통합 인사는 성과로 증명돼야 한다. 보수 출신 인사라 할지라도 개혁 방향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과감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반대로 진보 출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보호받는 구조도 사라져야 한다. 이 원칙이 지켜질 때, 여야를 넘는 인사는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진보 정치가 지향해 온 공정의 가치 역시 여기에 있다. 공정이란 출신과 배경이 아니라, 역할과 성과로 평가받는 구조다. 인사에서조차 진영 논리가 작동한다면, 공정을 말할 자격은 약해진다. 이재명 대통령의 인사 기조는 공정을 제도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공직 사회에 주는 신호다. “정권이 바뀌어도 능력이 있으면 일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행정의 안정성과 전문성을 높인다. 이는 결국 진보 정책의 실행력을 강화하는 효과로 돌아온다. 정권 초반의 속도전보다, 중장기적 성과가 중요한 이유다. 이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는 여야 통합 인사는 아직 완성형이 아니다. 시작 단계이며, 평가 역시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의 흐름은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을 넘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가려는 방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진보 정부가 오래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서경』에는 “사람을 얻으면 나라가 안정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같은 편이 아니라,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인사 정책을 놓고 여권은 당장 감정적 불편함보다, 장기적 국정 성과와 사회 통합이라는 큰 그림을 놓고 평가할 때다. 여야를 넘는 인사는 진보의 포기가 아니라, 진보의 진화다. 개혁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을 쓰되, 분명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 그것이 성숙한 리더십이며, 지금 이 대통령이 보여주려는 정치의 모습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결과다. 그 결과가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면, 오늘의 인사는 내일의 성과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진보 정부가 통합을 말할 수 있을 때, 그 개혁은 비로소 사회 전체의 자산이 된다. 지금의 인사 흐름이 그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25-12-28 18: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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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엔화의 귀환, 한국 경제는 준비돼 있는가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0.75%로 끌어올렸다. 숫자만 보면 미미해 보이지만,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일본이 마이너스 금리와 초저금리라는 ‘비정상’의 시대를 접고 정상화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30년간 잠들어 있던 엔화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의 국내 금융시장은 비교적 차분했다. 이미 예고된 조치였고, 시장은 학습돼 있었다. 그러나 진짜 파장은 이제부터다. 일본의 금리 인상은 단순한 통화정책 변화가 아니라 글로벌 자금 흐름의 방향을 바꾸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 수출기업부터 보자. 엔화 강세는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자동차, 기계, 전자부품 등에서 한국 기업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특히 일본 기업과 글로벌 시장에서 직접 경쟁하는 대기업들에게는 단기적으로 숨통이 트일 수 있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이르다. 엔화 강세는 일본 기업의 원가 부담을 높이고, 이는 부품·소재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일본산 중간재 의존도가 높은 한국 제조업은 비용 압박을 피하기 어렵다. 수입기업의 셈법은 더욱 복잡하다. 엔화 가치 상승은 일본에서 들여오는 원자재·부품·설비의 가격 상승을 의미한다. 정밀기계, 반도체 장비, 화학 소재를 일본에 의존하는 기업들은 곧바로 원가 부담을 체감할 것이다. 반면 일본 내수용 소비재를 수입하는 일부 기업은 환율 변동을 가격 전가로 흡수하기 어려워 수익성 악화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유학생과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보다 직관적이다. 엔화 강세는 학비와 생활비 부담을 키운다. 이미 일본 유학의 ‘가성비’는 상당 부분 훼손됐다. 아르바이트 소득으로 버티던 유학생들에게 환율은 체감 물가 그 자체다. 반대로 일본에서 벌어들이는 소득을 원화로 환전하는 이들에게는 유리하지만,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엔 캐리 트레이드다. 초저금리 엔화를 빌려 글로벌 자산에 투자해 온 자금은 최대 4조 달러로 추산된다. 일본 금리가 오르면 이 자금은 되돌아갈 명분을 얻는다. 한국 증시와 채권시장에 유입된 일부 자금도 예외가 아니다. 아직은 ‘가능성’의 영역이지만, 시장은 늘 가능성을 먼저 가격에 반영한다. 일본의 금리 정상화는 한국 경제에 시험지를 던지고 있다. 환율, 자본 이동, 산업 경쟁력, 가계 부담까지 모든 변수가 동시에 흔들린다. 문제는 우리가 이 시험을 얼마나 준비했느냐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지나 출구 전략에 들어섰지만, 한국은 여전히 고금리·저성장이라는 복합 위기 한가운데에 서 있다. 엔화의 귀환은 시작일 뿐이다. 파도는 아직 본격적으로 밀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는 이미 달라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안도감이 아니라 대비다. 시장이 조용할 때가 정책과 기업, 그리고 개인이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2025-12-22 09: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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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쿠팡 김 의장은 자본이 보내는 신호를 심각하게 생각하라
김범석 쿠팡 의장은 국회의 경고 앞에서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여야가 새로운 법을 만들어서라도 책임을 묻겠다고 나서고 제도적 제재 방안이 공개적으로 거론되는데도 그의 태도는 무심하다. 침묵은 전략일 수 있으나 반복될수록 오만으로 읽힌다. 민주 사회에서 국회는 협상의 상대가 아니라 국민을 대신한 질문자다. 그 질문을 무시하는 순간 기업은 스스로를 법과 상식 위에 놓게 된다. 문제의 본질은 단순하다. 한국 사회의 소비자와 노동, 공공 인프라 위에서 성장한 기업의 실질적 최고 책임자가 민주적 통제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 의장은 ‘글로벌 기업가’라는 말로 국회 출석 요구를 비켜가고, 외국인 대표를 전면에 세웠다. 형식적으로는 법을 어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형식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책임의 얼굴을 요구하는 것이 민주적 상식이다. 고전은 이 문제를 이미 꿰뚫고 있다. 『논어』에서 공자는 “정명(正名)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어그러지고 말이 어그러지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실질적 권한을 가진 사람이 책임의 이름을 피하는 사회에서 공정한 질서가 설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 김 의장의 태도는 바로 이 정명을 무너뜨리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왜 국회의 압박은 김 의장에게 크게 먹히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이유는 분명하다. 법과 제도는 시간이 걸리고 여론의 파고는 기업이 관리 가능한 변수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지점이 하나 있다. 바로 자본의 신뢰다. 시장은 정치적 발언보다 자금의 움직임에 더 민감하다. 특히 국민연금은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다. 국민의 노후 자산을 운용하는 공적 기금이자, 시장에 ‘사회적 기준’을 제시하는 상징적 투자자다.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은 단지 수익성만이 아니라 지배구조, 책임성, 사회적 신뢰를 함께 평가받는다. 이는 압박이 아니라 원칙이다. 해외 사례는 분명한 메시지를 준다.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인권 침해, 환경 파괴, 지배구조 문제를 이유로 글로벌 대기업들의 투자 비중을 축소하거나 철회해 왔다. 그 결정은 정치적 제재가 아니라 장기 리스크 관리라는 명분 아래 이뤄졌다. 그 결과 해당 기업들은 이미지 타격을 넘어 다른 글로벌 투자자들로부터도 동일한 질문을 받게 됐다. “이 기업은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연기금과 공적 펀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투자 판단의 핵심 기준으로 삼고 있다. 최고경영진의 책임 회피, 의회 불응, 불투명한 지배구조는 장기 투자 관점에서 ‘위험 요인’으로 분류된다. 글로벌 자본은 도덕을 말하지 않지만 신뢰를 가격에 반영한다. 김 의장이 가장 두려워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국민연금이 공개적으로 투자 지속 여부를 재검토하는 국면으로 가닥이 잡힌다면 이는 단일 기관의 판단을 넘어선 신호가 된다. “이 기업의 리스크는 관리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외국인 투자자들 사이에서 확산될 수밖에 없다. 자본은 집단적으로 움직이며 불안은 전염된다. 맹자는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고 했다. 공정한 규칙과 신뢰라는 ‘항산’이 무너지면 시장의 안정적 판단이라는 ‘항심’도 사라진다. 국민연금의 투자 회수 가능성은 처벌이 아니라 경고다. 신뢰의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경고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특정 기업을 겨냥한 보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반대다. 공적 자금은 공적 책임을 외면하는 기업에 대해 질문할 의무가 있다. 투자 철회는 최후의 수단이지만 그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야말로 직무 유기다. 이제 선택은 김범석 의장에게 있다.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국회와 사회를 관리 대상으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공개된 자리에서 책임 있는 설명으로 신뢰를 회복할 것인가. 전자는 단기적으로는 편할 수 있으나 자본의 기억은 길다. 후자는 불편하지만 지속 가능한 길이다. 『사기』에서 사마천은 “큰 장사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만큼 큰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에서 거대한 성장을 이룬 기업의 수장이 그 책임을 외면한다면 그 성장은 언젠가 비용으로 돌아온다. 국민연금의 선택은 그 비용을 미리 경고하는 장치일 뿐이다. 시장은 냉정하다. 신뢰를 잃은 기업에는 침묵보다 더 무서운 방식으로 답한다. 김범석 의장이 지금 귀 기울여야 할 것은 국회의 법안 문구가 아니라 자본이 보내는 이 조용한 신호다.
2025-12-21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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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쿠팡 김범석의 침묵은 민주주의에 대한 조롱이다
기업의 크기가 사회적 영향력을 결정하는 시대, 그 영향력에 비례하는 ‘책임의 무게’는 경영자의 숙명이다. 그러나 쿠팡의 실질적 지배주주인 김범석 의장은 이 자명한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최근 국회 국정감사를 비롯한 공적 질의의 장에서 그가 보여준 행보는 단순한 ‘출석 불응’을 넘어선다. 그것은 한국의 민주적 통제 시스템과 시민사회를 향한 의도적인 무시이자,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수천만 소비자와 수십만 노동자에 대한 기만이다. 김 의장은 국적과 ‘글로벌 경영자’라는 직함을 방패 삼아 책임의 자리를 비워두었다. 그가 머무는 ‘글로벌’이라는 영역은 혁신의 공간이 아니라 한국 법과 사회적 비판이 닿지 않는 성역(聖域)이 되어버렸다. 권한은 무소불위로 휘두르되 책임은 외국인 대표자나 실무진에게 떠넘기는 이른바 ‘책임의 외주화’는 이제 쿠팡의 경영 전략처럼 굳어지는 양상이다. 미국식 스탠더드는 왜 '청문회' 앞에서만 멈추는가 김 의장과 쿠팡이 그토록 강조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모델로 삼는 미국의 아마존, 메타, 구글의 CEO들은 어떠했는가. 제프 베이조스, 마크 저커버그, 순다르 피차이는 매번 의회의 호출을 받을 때마다 고통스러운 질문과 날 선 비판 앞에 섰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다. 거대 기업이 사회 구조를 바꿀 만큼 강력해졌다면 그에 상응하는 공적 설명을 내놓는 것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맺은 최소한의 사회적 계약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의장은 한국에서 얻은 막대한 이익과 성장은 ‘글로벌 기업’의 성과로 포장하면서 그 과정에서 발생한 과로사 논란, 블랙리스트 의혹, 불공정 거래 행위 등에 대해서는 ‘전문 경영인’ 뒤로 숨어버린다. 이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라 ‘글로벌 오만’이다. 미국 의회였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만함이 한국 국회에서는 ‘관리 가능한 리스크’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와 맹자가 묻는 기업가의 '의(義)'와 '본(本)' 공자는 “군자는 의(義)를 밝히고 소인은 이(利)를 밝힌다”고 했다. 오늘날 김 의장의 선택은 철저히 이익의 계산기 위에 놓여 있다. 국회 출석으로 인한 이미지 손상과 발언의 법적 리스크를 저울질한 끝에 그는 ‘도피’라는 가장 비겁한 효율을 택했다. 하지만 기업이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는 순간 그 어떤 재무제표의 숫자도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맹자의 민본주의(民本主義) 관점에서 볼 때도 그의 행태는 반(反)시대적이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는 가르침은 현대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업의 토대는 소비자(백성)와 공동체(사직)다. 경영자는 그 토대 위에서 잠시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김 의장은 스스로를 공동체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설정한 듯하다. 국회와 국민을 아래에 두고 자신의 ‘글로벌 일정’을 이해해달라 강요하는 태도는 민주적 질서를 거꾸로 세우려는 시도와 다름없다. 한국은 시장인가 아니면 책임 회피의 실험장인가 연속되는 김 의장의 행보를 보며 대중은 묻는다. 그는 진심으로 한국을 동반 성장의 파트너로 보는가 아니면 법망의 허점을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테스트베드’로 보는가.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면서도 법적 책임에서는 비켜나 있는 현재의 구조는 민주주의의 허점을 파고드는 정교한 설계처럼 보인다. 이런 행태가 용인된다면 이는 향후 모든 글로벌 기업에 잘못된 시그널을 주게 된다. “한국에서는 돈만 벌고 책임은 회피해도 무방하다”는 인식이 고착되는 순간 대한민국의 자존심은 무너지고 시장 질서는 왜곡될 것이다. 이제는 국회와 사회가 답해야 한다. ‘유감’ 표명이라는 공허한 메아리를 반복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 지배력을 기준으로 책임을 묻고 불응에 대한 강력하고 실효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 혁신가와 회피자의 갈림길 김범석 의장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기술로 세상을 바꾸는 ‘혁신가’로 기억될 것인가 아니면 책임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회피자’로 남을 것인가. 진정한 리더십은 화려한 보도자료나 나스닥 상장 종목명에 있지 않다. 자신을 키워준 사회의 정당한 물음에 직접 답하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성공의 열매는 독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책임은 결코 혼자 피할 수 없다. 김 의장이 지금처럼 침묵을 방패 삼아 숨어 지낸다면 쿠팡이 쌓아 올린 ‘로켓 성장’의 탑은 언젠가 ‘신뢰의 결핍’이라는 기초 부실로 인해 흔들리게 될 것이다. 국민은 더 이상 그의 ‘글로벌’ 핑계를 믿지 않는다. 이제 그가 직접 광장으로 나와 책임의 언어로 답할 차례다.
2025-12-19 11: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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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한국 정치, 이대로는 안 된다. (5)
정치인들의 언행 불일치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민 앞에서는 공정과 정의를 외치며 근엄한 표정을 짓지만, 정작 뒤로는 사익 앞에서 언제든 태도를 바꾸는 일이 너무나 흔하다. 정치권은 이중적 행태가 들통날 때마다 “국민께 송구하다”는 똑같은 문구를 반복하지만, 반성과 변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 국민은 놀라기보다 지쳤고, 분노하기보다 냉소가 깊어졌다. 그렇게 ‘내로남불(內勞南不)’은 대한민국 정치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최근의 사례만 보더라도 그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신들이 가진 직무상 비공개 정보를 이용해 주식 투자에 나섰다가 들킨 의원들, 자녀 교육을 명분으로 아무렇지 않게 위장전입을 단행한 인사들, 갭 투자로 시세 차익을 챙기면서 한편으로는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법을 만든다며 목소리 높이던 정치인들까지. 이렇게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습을 보고 국민이 어떻게 그들의 주장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런 때 쓰라고 만들어진 말이 ‘표리부동(表裏不同)’이다. 문제는 이런 위선적 행태가 단발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들킬 때마다 “개선하겠다”고 말하지만, 돌아서면 다시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지적을 받으면 오히려 큰소리치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은 ‘적반하장(賊反荷杖)’에 다름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누적된 위선이 정치 전체에 대한 국민 신뢰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의 정치 불신은 이제 구조적 회의로 변했고, “정치인은 원래 그렇다”는 씁쓸한 말이 일상어가 되어버렸다. 신뢰가 무너진 정치가 아무리 개혁을 외쳐도 그 말은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정치권은 지금이라도 이 위기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정치인의 윤리 의식이 낮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낮은 윤리를 방치해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에 있다. 제도가 허술하니 도덕이 흔들리고, 도덕이 무너지니 신뢰가 사라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국민의 정치 불신을 되돌리려면, 이 구조를 송두리째 뜯어고쳐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안해 본다. 먼저 이해충돌 방지 체계를 실질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비공개 정보 기반 투자나 부동산 투기와 같은 행위를 사전에 원천 봉쇄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국회의원 본인은 물론 가족 명의까지 포함한 전수 조사가 가능해야 한다. 공직자의 재산 변동 과정 전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의혹이 생기기 전에 미리 차단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 정치권 외부에서 감시·징계를 결정하는 상설 시민 감시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 국회 윤리특위가 동료 감싸기라는 비판에서 벗어나려면, 정치인 스스로가 징계를 판단하는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변호사·회계사·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독립기구가 공직자 윤리 위반에 대해 실질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다음은 위선적 언행에 대한 강제적 책임 규정을 도입해야 한다. 위장전입·갭 투자·입시 특혜·정보 이용 투자 등 국민 분노를 일으키는 사안에 대해 일정 기준 이상 적발되면 자동으로 공직에서 배제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공인은 일반 국민보다 더 높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법으로 명문화해야 한다. 이와 함께 공직자 윤리 교육을 실효성 있게 개편해야 한다. 지금처럼 보여주기식 교육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실제 상황 기반 윤리 훈련, 이해충돌 회피 사례 연구, 정기적인 윤리 감수성 점검 등 실질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투명한 공개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출결 현황, 법안 발의, 징계 이력, 이해충돌 회피 노력 등 의정활동의 모든 요소가 실시간으로 공개돼야 한다. 정치인은 국민의 평가에서 숨을 곳이 없어야 한다. 정치가 신뢰를 잃으면 국가의 기초가 흔들린다. 정치인은 국민이 띄우는 배이며, 국민은 언제든 그 배를 뒤집을 수 있다. 고사성어 ‘군주민수(君舟民水)’가 전하는 경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정치권이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정치의 미래는 여전히 어둡기만 할 것이다. 국민은 더 이상 공허한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지도자를 원한다. 그리고 그 실천이야말로 신뢰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2025-11-28 11: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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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한국 정치, 이대로는 안 된다. (4)
‘막말 정치’는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라 정치 자체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피로를 증폭시키는 암적 존재다. 최근 정계에서 벌어지는 저급한 단어 선택과 감정적 비난, 여야 간 무의미한 정쟁은, 마치 시장 잡배들끼리 벌이는 싸움처럼 느껴질 정도다. 국회 상임위원회에서는 정책 논의 대신 욕지거리 배틀이 열리고 공당의 대변인들조차 정제되지 못한 언어로 당의 공식 입장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정치인에 대한 존경은 커녕 깊은 혐오감마저 느끼게 된다. 예컨대, 어느 의원이 청문회 자리에서 “살인자”라는 단어를 공공연히 사용한 것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선 폭언이며, 이는 정치의 품격을 땅에 내동댕이치는 행위다. 이런 막말이 반복되면 국민은 더 이상 정치인의 말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정치가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욕설의 장이 된다면 그것은 “오합지졸(烏合之卒)”의 집단이 정치판에 난무하는 꼴이다. 더욱이 공당의 공식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대변인들이 수준 이하의 표현을 남발한다는 것은 당 자체의 품격을 갉아먹는 자해 행위다. 이는 마치 “가렴주구(苛斂誅求, 백성들에게 무리하게 세금을 거두고 재물을 빼앗는 상황)”처럼,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민심을 도리어 해치고 정치를 향한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대로 좌시할 수만은 없다. 정치의 언어를 세련되게 다듬고 막말에 책임을 묻는 제도적 장치를 세워야 한다. 예로 아래 4가지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첫째, 국회 윤리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해 막말 행위에 대해 명확한 제재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말 한마디에도 책임이 따르도록 윤리 벌금, 공개 사과, 심각한 경우 사기 징계를 포함한 징계 제도가 필요하다. 둘째, 정치인 언어 교육과 코칭 프로그램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공천을 받은 후보자뿐 아니라 현직 의원도 정기적으로 소통·토론 역량을 강화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셋째, 상임위원회와 본회의의 토론 구조를 개혁하여 정쟁보다는 정책 중심의 논의를 장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비속어 사용 금지 조항’을 규정하거나 언어 품질 평가에 따른 토론 우선권 제도를 도입할 수 있다. 넷째, 정당 내부의 대변인 임명 절차를 투명히 하고 대변인 선발 시 언어력·소통력도 평가 요소로 포함해야 한다. 이런 제도적 개혁을 통해 우리는 정치 언어의 품격을 되찾고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말은 단지 표현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의 도구다. 정치인들이 말 한마디에 신성함을 담고 자숙과 성찰의 태도로 언어를 다룰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다. 막말이 아닌 품위 있는 언어가 국회와 여야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정치의 사다리가 무너진 지금, 말의 격을 높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2025-11-23 13:4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