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총 3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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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그룹 권혁 회장과 '환영받는 부'의 기준
[이코노믹데일리] 해운업은 물류 산업이자 국가의 기억을 실어 나르는 산업이다. 배는 화물을 싣고 항로를 오가지만, 그 과정에서 축적되는 것은 단순한 수익만이 아니다. 전쟁과 재난, 이주와 교역의 장면들이 바다 위에 겹겹이 쌓이며 사회의 기억으로 남는다. 해운 자본이 다른 산업과 구분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외에서 해운 자산가가 문화적 평가의 대상이 된 사례는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20세기 해운업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주 언급되는 아리스토텔 오나시스 역시 사업 성과만으로 평가되지는 않았다. 선박과 항로를 넘어 항공, 문화, 공공 영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며 사회적 존재감을 형성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찬사와 비판이 교차했지만, 해운 자본이 문화와 공공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인식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최근 국제 해운업계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관찰된다. 선박 보유 규모나 운임 실적보다, 자본이 사회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가 다시 거론되는 사례들이다. 해양 사고와 재난이 반복되는 환경 속에서, 일부 해운 자본은 구호와 안전, 기록과 교육을 중심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왔다. 이는 일회성 기부와는 다른 접근이다. 대표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는 해양문화재단 설립이다. 독립적인 이사회를 두고 항해사와 선원의 삶을 기록하며, 해양을 주제로 한 문학·영화·전시를 지원하는 형태다. 바다를 ‘부의 상징’이 아니라 사회가 공유하는 문화 자산으로 남기려는 시도다. 이러한 활동은 당장의 성과보다 시간이 지나며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재를 향한 접근도 눈에 띈다. 취약계층 청년을 대상으로 한 해양 직무 체험 프로그램, 항만과 선박 현장을 잇는 교육 과정, 이후 취업으로 이어지는 연계 구조가 그것이다. 해운업이 일부 종사자만의 폐쇄적 영역이라는 인식을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춘 시도다. 단기 지원이 아니라 산업 진입의 통로를 만드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인도주의적 역할을 전면에 둔 사례도 있다. 분쟁 지역이나 재난 발생 시 구호 물자를 전용 항차로 운송하고, 연간 목표 물량과 운용 내역을 공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항로는 수익과 직접 연결되지 않지만, 해운업이 위기 국면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남았다. 이러한 선택들은 ‘선행’이라는 말로 쉽게 묶이지 않는다. 자본이 문화와 윤리, 공공성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에 가깝다. 돈의 크기보다 쓰임의 방향이 평가의 기준이 되는 순간이다. 권혁 회장을 둘러싼 논쟁 역시 이 지점에서 새로운 맥락을 갖는다. 해운업을 통해 축적된 자산이 사회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시선이다. 사법 판단과는 별개로, 해운 자본이 공공의 기억과 신뢰로 남는 경로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뒤따른다. 배는 화물을 싣고 항로를 오간다. 그러나 해운 자본이 남기는 것은 결국 시간 속에서 쌓이는 신뢰다. 해운업이 산업을 넘어 문화로 읽히는 순간, 자산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2026-01-14 09: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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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奈良)가 던지는 1300년의 질문
외교에서 장소는 배경이 아니다. 장소는 메시지다. 때로는 합의문보다 정직하고 정상(頂上)의 발언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13일 한·일 정상회담이 일본의 고도(古都) 나라현(奈良県)에서 열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의전상의 편의나 지방 활성화를 위한 선택이 아니다. 한·일 관계를 어떤 시간대, 어떤 지층(地層) 위에 올려놓을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의사 표현이다. 나라현은 일본의 한 지방 도시가 아니다. 일본이 '국가'라는 틀을 처음 갖춘 원점이며 동아시아가 충돌하기 이전 문명과 제도를 공유하던 기억이 응축된 공간이다. 이 공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번 회담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를 넘어 동아시아 질서의 복원이라는 거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나라현은 8세기 일본의 수도 헤이조쿄(平城京)가 있던 곳이다. 일본이 율령을 반포하고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의 기틀을 다진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 '출발'은 일본 내부의 자생적 결과물이라기보다 외부 문명을 필사적으로 수용한 선택의 결과였다. 헤이조쿄는 당나라 장안성을 그대로 본뜬 계획도시였다. 도시의 구획부터 관료제, 법률, 의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대륙의 선진 문명을 이식해 자신들을 '문명국'의 반열에 올리고자 했다. 즉, 나라현은 일본이 처음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문법을 학습하고 제도화한 공간이다. 오늘 두 정상이 이곳에 선다는 것은 근현대의 불행한 충돌 이전으로 시선을 돌려보자는 신호다. 100년의 갈등이 아니라 1000년의 교류를 보자는 제안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시선에서 나라는 또 다른 층위의 의미를 갖는다. 일본은 이곳을 자신들의 역사가 시작된 성소(聖所)라 말하지만 그 바닥을 파보면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과 기술, 사상의 흔적이 지층처럼 깔려 있다. 나라 일대에는 지금도 '고려', '백제'라는 지명이 선명하다. 일본의 정사(正史)조차 백제·신라·고구려계 도래인들이 국가 건설의 핵심 엔지니어이자 브레인이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불교와 건축, 토목과 의학, 금속 기술까지 고대 일본을 지탱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한반도를 혈관으로 삼아 유입됐다. 이것은 묵은 국수주의적 감정이 아니다. 차가운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 고대 국가의 성립은 한반도와의 교류 없이는 설명 불가능하다. 나라는 일본만의 시작점이 아니라 한반도가 일본이라는 국가의 설계에 깊숙이 개입했던 '공동의 기억'이 서린 장소다. 왜 하필 지금 나라였는가. 도쿄는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 근현대 정치의 악취가 밴 공간이다. 히로시마는 전쟁의 가해와 피해가 뒤엉킨 복잡한 도시다. 반면 나라는 근대 이전 총칼이 오가기 이전의 기억이 보존된 곳이다. 이곳에서의 만남은 과거사를 덮자는 뜻이 아니다. 과거를 다루는 순서를 바꾸겠다는 전략적 선택이다. 식민과 침략의 시간보다 교류와 공존의 시간을 먼저 소환하고 대립의 기억보다 공동 번영의 기억을 앞에 두겠다는 의지다. 군사 기지도, 현대 정치의 소음도 없는 이곳에서 침묵과 배치가 웅변하는 메시지는 '공존'이다. 이번 회담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한·일 관계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 나라현에서의 정상 외교는 한국을 늘 설명하고 사과받아야 하는 '피해자'의 위치에만 가두지 않는다. 문명을 전파하고 국가를 함께 설계했던 '역사적 주체'의 자리로 우리를 다시 불러낸다. 이는 외교적 자존감의 회복이다. 동시에 일본에는 무거운 부담이다. 자신들이 외부 문명을 수용해 성장했다는 사실, 그 성장의 젖줄이 한반도였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용기가 있는지 묻고 있기 때문이다. 외교는 종종 합의문보다 그들이 서 있는 땅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나라현이 건네는 메시지는 명징하다. 갈등의 역사만으로 두 나라를 규정할 수 없으며 우리는 한때 서로 배우고 가르치며 동아시아라는 세계를 함께 조형(造形)했던 파트너였다는 사실이다. 그 질서를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어디서부터 꼬인 실타래를 풀고 대화를 시작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나라는 바로 그 '시작의 기억' 위에 서 있다. 오늘 열리는 정상회담은 구체적인 성과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갈등의 시대에도 동아시아는 한때 함께 설계된 질서였다는 사실, 그 엄연한 역사의 무게를 양국 정상이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번 만남의 의미는 충분하다.
2026-01-13 10: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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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그룹 권혁 회장, 해운 강국의 다음 장을 고민할 시간
[이코노믹데일리] 해운업은 한 나라의 산업 체력을 드러내는 분야다. 수출입 물동량을 실어 나르는 기능을 넘어, 위기 상황에서는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다. 전쟁과 재난, 공급망이 흔들릴 때마다 해운의 역할이 다시 거론되는 이유다. 최근 해운업을 둘러싼 논의의 방향도 선박 보유량에서 안전과 친환경, 인재로 옮겨가고 있다. 시도그룹 권혁 회장이 몸담아 온 해운업 역시 이러한 전환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과거 해운 경쟁력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배를 확보했는지에 맞춰졌다. 그러나 국제 해운 시장에서 주목받는 기준은 달라졌다. 사고를 줄이는 안전 체계, 환경 규제에 대응하는 연료 전환, 이를 뒷받침할 인력과 기술이 새로운 판단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해운 안전은 개별 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선원 교육과 장비, 통신 체계가 동시에 작동하지 않으면 사고를 막기 어렵다. 국제 해사기구를 중심으로 안전 규제가 강화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일부 해운 강국에서는 선원과 항만 인력을 대상으로 한 전문 교육 프로그램을 국가 경쟁력의 일부로 관리하고 있다. 해상 운송 경험에 인공지능 기반 항로 분석과 연료 관리 기술을 결합하는 시도도 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시도그룹이 성장해 온 전통적인 해운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친환경 전환 역시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국제 규범은 선박 연료를 기존 중유에서 암모니아나 메탄올 등 저탄소 연료로 전환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대형 선사들은 이미 선대 교체에 나섰지만, 중소 해운사는 비용 부담으로 전환 속도가 더디다. 일부 국가에서는 민간 자본이 참여하는 전환 펀드를 통해 개조 비용을 분담하고, 상환을 장기화하는 방식이 활용되고 있다. 해운업에 장기간 몸담아 온 경영자일수록 이러한 변화의 무게를 체감할 수밖에 없다. 연구 개발 역시 해운 경쟁력을 가르는 중요한 축으로 떠올랐다. 연비 개선, 배출 저감, 사고 예방 기술은 단기간에 성과가 나타나기 어렵다. 정부와 대학, 민간 자본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연구 방식이 늘어나는 이유다. 해양 기술 분야에서는 민간 자본이 마중물 역할을 하며 기술 상용화를 앞당긴 사례도 전해진다. 이는 단순한 지원을 넘어 산업의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일회성 기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산업의 다음 20년과 30년을 전제로 한 선택에 가깝다. 해외 해운업계에서 평가를 받아온 자산가들 역시 선박 확장에만 머물지 않았다. 안전과 인재, 기술에 자본을 연결하는 방향을 택했고, 그 과정이 시간이 지나며 신뢰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권혁 회장을 둘러싼 논쟁도 이 지점에서 다시 읽힌다. 이미 과거의 사법 판단은 내려졌다. 이후의 관심은 해운업이라는 산업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로 옮겨가고 있다. 선대를 확장해 온 경험이 산업 전반의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자본이 머무는 방향이 어디로 설정될지가 자연스럽게 거론되는 이유다. 해운업에서 남는 것은 배의 숫자만이 아니다. 사고를 줄였는지, 기술을 키웠는지, 다음 세대가 바다로 들어올 길을 열었는지가 시간이 지나며 기록으로 남는다. 국제 해운 시장에서 평가의 기준이 달라지고 있는 만큼, 선택의 무게도 함께 달라지고 있다. 배를 많이 가진 선주와 바다의 내일을 만든 선주는 같은 평가를 받지 않는다. 해운 강국의 토대는 결국 그 차이에서 만들어진다.
2026-01-13 08: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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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그룹 권혁 회장, '한국의 오나시스'라는 비교가 다시 나오는 이유
[이코노믹데일리] 권혁 회장은 국내 해운업계에서 ‘선박왕’으로 불려 왔다. 해상 운송이라는 변동성 큰 산업에서 장기간 사업을 이어오며 선대를 확장했고, 그 과정에서 축적한 자산 규모와 사업 방식은 업계 안팎에서 꾸준히 언급돼 왔다. 동시에 권혁 회장의 이름에는 대규모 조세 분쟁과 형사 절차라는 이력도 함께 따라붙는다. 이 두 가지가 겹치며 권혁 회장은 한국 사회에서 평가가 갈리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권혁 회장을 설명할 때 해외 사례가 함께 거론되곤 한다. 20세기 해운업을 상징하는 인물로 알려진 아리스토텔 오나시스다. 오나시스 역시 전후 세계 해운 시장에서 막대한 자산을 축적한 선주였다. 전쟁과 혼란의 시기에 선박을 활용한 물자 수송과 복구에 참여했고, 항공과 해운 인프라 투자에도 나섰다. 이 행보를 두고 위기 국면에서 역할을 수행한 자산가라는 평가와 사업 확장의 연장선이라는 해석이 함께 제기됐다. 오나시스의 이름은 긍정과 비판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자산가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권혁 회장을 둘러싼 논쟁도 성격이 다르지 않다. 해운업을 통해 자산을 축적한 과정 자체를 문제 삼는 시각은 많지 않다. 관심은 자산 형성 이후 단계에 쏠려 왔다. 축적된 자산이 어떤 경로로 관리되고 이전됐는지, 그 과정이 법과 제도의 범위 안에 있었는지가 논의의 중심이 됐다. 권혁 회장이 대규모 조세 분쟁의 당사자로 거론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혁 회장을 둘러싼 사회적 관심은 기부나 공익 활동보다 조세 회피와 탈세의 경계, 자본 이동과 과세 기준에 집중돼 왔다. 개인의 자산 운용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법은 어떤 선에서 개입하는지를 두고 논의가 이어졌다. 그 결과 권혁 회장은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규모의 사법 판단을 받은 사례로 기록됐다. 권혁 회장 사건의 특징은 논쟁의 초점이 비교적 이른 시점부터 법적 판단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사회적 기대나 도덕적 평가가 확산되기 전에 사법 절차가 전면에 등장했고, 평가는 공헌 여부가 아니라 법 위반 여부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자산가를 둘러싼 논쟁이 어떤 경로로 수렴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해외 해운업계에서는 법원의 판단 이후에도 추가적인 평가가 이어진 사례들이 확인돼 왔다. 형사 책임과는 별도로, 번 돈을 사고와 재난에 어떻게 쓰는지, 안전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가 함께 거론된 경우들이 있었다. 해상 사고나 재난이 발생하면 자동으로 집행되는 구호 기금을 미리 마련하고, 그 사용 내역을 정기적으로 공개한 사례가 있었고, 선원 안전 장비와 구조 인프라 개선에 매출의 일정 비율을 연동해 출연하며 외부 감사로 관리한 경우도 전해진다. 이런 선택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한 조치라기보다 시간이 지나며 신뢰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권혁 회장을 둘러싼 논쟁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법적 판단이 내려진 사안과는 별도로, 이후 어떤 선택이 이어질지에 대한 시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산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보다, 그 이후 자산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가 또 다른 판단의 기준으로 거론되고 있다. 권혁 회장을 둘러싼 논의는 특정 인물에 대한 평가를 넘어, 자본과 법이 만나는 지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확장돼 왔다. 이 논쟁이 이어지는 이유 역시 그 지점에 있다. 돈을 번 사람은 적지 않다. 그 이후의 선택으로 평가받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2026-01-09 16:5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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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에서 'AI'라는 주술(呪術)을 치워라
세밑의 풍경은 늘 을씨년스럽지만 기업 총수들의 신년사가 메일함을 가득 채울 때쯤이면 비로소 해가 바뀜을 실감한다. 오랜시간동안 이 바닥에서 지켜본바, 한국 기업의 신년사는 시대의 욕망을 투영하는 거울이자 때로는 공허한 언어의 성찬이었다. 한때는 ‘유비쿼터스’가 세상을 구원할 듯했고 어느 해는 실체 없는 ‘창조경제’가, 근래에는 ‘메타버스’와 ‘ESG’가 그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장담컨대 2026년 병오년 새해 아침을 뒤덮을 단어는 단연코 ‘AI(인공지능)’일 것이다. “AI 컴퍼니로의 대전환”, “AI를 통한 초격차 달성”. 안 봐도 비디오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비장한 선언들이 복제된 듯 쏟아질 게 뻔하다. 그래서 감히 제언한다. 부디 이번 신년사에서만큼은 ‘AI’라는 단어를 빼주시라. 아니, 금기어로 지정해 주시라. 왜냐고 묻는다면 이제 ‘AI 하겠다’는 말은 ‘열심히 하겠다’는 말처럼 하나 마나 한 소리가 됐기 때문이다. 지난 2025년을 복기해 보라. 우리는 AI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현기증 나는 한 해를 보냈다. 주가는 요동쳤고 모든 서비스에 챗봇이 붙었으며 기업들은 앞다퉈 AI 조직을 신설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묻자.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는가. 화려한 ‘개념 증명(PoC)’의 잔치가 끝난 자리엔 천문학적인 GPU 비용과 데이터센터 전기료 청구서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걸 상쇄할 만큼의 ‘진짜 돈’을 벌어들인 기업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우리는 지난 1년, AI라는 마법의 단어 뒤에 숨어 구체적인 전략 부재를 감추는 ‘게으른 경영’을 너무 많이 목격했다. 주주들을 달래기 위해 혹은 경쟁사보다 뒤처져 보이지 않기 위해 앵무새처럼 AI를 외쳤던 건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야 한다. 지금 시장과 소비자가 느끼는 것은 ‘피로감’이다. ‘묻지마 투자’의 시기는 끝났다. 월가는 이미 빅테크의 멱살을 잡고 “그래서 수익 모델이 뭐냐”고 따져 묻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무늬만 AI’ 기업들이 옥석 가리기의 파고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2026년은 ‘기대감’을 파는 해가 아니라 ‘효용’을 증명해야 하는 해다. 그러니 CEO들이여, 신년사 원고에서 ‘AI’를 지워보라. 그 단어를 뺐을 때 당신의 신년사에 남는 알맹이가 있는가. “AI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추상적인 말 대신 “불필요한 보고 절차를 30% 줄이겠다”고 말하라. “AI로 고객 경험을 혁신하겠다”는 공허한 외침 대신 “고객의 대기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하라. “글로벌 AI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선언 대신, “데이터 보안에 사활을 걸어 두 번 다시 고객 정보를 털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라. 진정한 고수는 기술을 자랑하지 않는다. 기술이 녹아든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전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나 떠들썩했지 지금 그 어떤 기업도 “우리는 전기를 사용하는 기업입니다”라고 홍보하지 않는다. AI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제 공기요, 전기와 같은 인프라다. 특별한 전략의 도구가 아니라 숨 쉬듯 당연한 생존의 조건이라는 뜻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AI라는 화려한 구호에 매몰되어 정작 챙겨야 할 ‘기본’을 놓치는 상황이다. 2025년 하반기 대한민국을 강타한 통신사 해킹 사태와 플랫폼 먹통 사고는 무엇을 웅변하는가. 기본기 없는 기술 도입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다. 엔지니어를 우대하는 문화, 데이터를 정직하게 관리하는 태도, 보안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여기는 경영 철학 없이는 아무리 비싼 GPU를 사들여도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2026년은 말띠의 해다. 말은 말이 없다. 그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릴 뿐이다. 기업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AI’라는 수식어로 치장된 화려한 말잔치는 2025년에 묻어두자. 대신 치열한 고민과 구체적인 숫자가 담긴, 땀 냄새 나는 신년사를 듣고 싶다. 세상을 바꾸는 건 마이크 앞의 선언이 아니라 현장에서 돌아가는 톱니바퀴다. AI를 빼라. 그리고 실력으로 증명하라. 그것이 2026년을 맞는 리더의 품격이다.
2025-12-29 14:5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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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든 재개발, 엇갈린 책임… 오세훈의 신통기획과 민주당의 출구전략
[이코노믹데일리] 서울 집값이 다시 오르자 정치권의 오래된 풍경이 되살아났다. 10·15 대책 이후에도 상승세가 꺾이지 않자 여당과 서울시는 서로를 향해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한쪽은 재개발·재건축이 막혀 공급이 부족해졌다고 하고, 다른 쪽은 전임 정부와 시장이 남긴 공급 공백을 문제 삼는다. 집값이 오를 때마다 등장하는 익숙한 장면이다. 문제는 이 공방이 해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개발·재건축이 지연되며 주택 공급이 부족해졌다는 진단에는 큰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논쟁은 “누가 막았느냐”에 머문다. 선거를 앞둔 국면에서는 효과적인 질문일지 몰라도, 집값을 안정시키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울 부동산 문제는 단일 시점의 정책 실패가 아니라, 오랜 시간 누적된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재개발·재건축은 정치인의 임기와 맞지 않는 정책이다. 구역 지정부터 착공까지 통상 10년 이상이 걸린다. 지금 시장에 나오는 물량은 현직 시장이나 현 정부의 성과라기보다, 10여 년 전 내려진 결정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결과에 가깝다. 이 단순한 시간의 논리를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외면해 왔다. 지난 20년간 서울에서 재개발·재건축 공급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2015년부터 2017년이다. 민주당 소속 시장 재임 시기였다. 그렇다고 이를 당시 시정의 성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 물량의 출발점은 2000년대 초 뉴타운 정책에 있다. 반대로 문재인 정부 말기 공급이 급감한 것도 임기 말 정책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전에 이어진 규제 강화와 대규모 정비구역 해제가 누적된 결과다. 뉴타운 정책은 서울의 주거 환경을 빠르게 바꿨지만, 동시에 원주민 이탈과 세입자 문제라는 뚜렷한 부작용을 남겼다. 이 경험은 재개발·재건축에 대한 강한 반작용을 불러왔고, ‘출구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정비구역 해제와 규제 강화가 이어졌다. 그 선택은 단기적으로 갈등을 줄였을지 모르나, 공급이라는 문제를 미래로 미뤘다. 그 미뤄진 시간이 결국 공급 공백으로 돌아온 셈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규제 완화를 내세우며 재개발·재건축에 다시 시동을 걸었을 때 상황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공사비는 급등했고, 분양가상한제와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는 그대로였다. 신속통합기획이 도입됐지만 착공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집값은 그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 사이 정치권은 다시 책임 공방에 들어갔다. 민주당은 신속통합기획의 실질 성과를 문제 삼고, 서울시는 과거의 공급 공백을 지적한다. 그러나 시장과 유권자가 묻는 질문은 다르다. “그래서 앞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다.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책 방향이 또다시 흔들릴 가능성만 커지고 있다. 시장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집값 그 자체보다 정책의 불확실성이다. 서울 집값 문제를 둘러싼 정치의 태도는 솔직하지 못했다. 개발의 부작용을 알면서도 공급의 필요를 외면했고, 공급 부족의 대가가 나타나자 책임을 돌렸다. 선거 때마다 정책은 바뀌고 사업은 멈췄다. 재개발·재건축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표 계산의 대상이 돼 왔다. 집값 앞에서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개발을 선택한다면 그 부작용을 감내할 준비를 해야 하고, 규제를 선택한다면 미래의 가격 상승을 감수하겠다고 솔직히 말해야 한다. 두 가지를 모두 피하려는 태도가 지금의 혼란을 만들었다. 서울 집값은 선거용 구호로 잡히지 않는다. 책임을 나누는 정치가 아니라, 책임을 떠안는 정치만이 시장을 설득할 수 있다. 유권자가 이번 선거에서 보고 싶은 것은 ‘네 탓’이 아니라, 이 불편한 진실을 감당할 준비가 돼 있는 정치다.
2025-12-22 1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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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의 '양손', 그리고 포스트 구자은의 시나리오
과거 LS그룹은 늘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움직이는 기업으로 평가받았다. 재계 서열에서는 늘 중상위권에 있었지만, 전기·전력·소재라는 산업적 기반 특성상 대중적 존재감은 다소 약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이 조용한 기업이 묵직함을 넘어 단단한 성장의 질감을 드러내고 있다. 중심에는 구자홍 초대회장, 구자열 2대 회장을 잇는 구자은 LS그룹 회장이 있다. 그가 내세운 ‘양손잡이 경영’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다. 기존의 전통 산업군을 강화하는 ‘왼손’과, AI·데이터·수소·CFE 같은 미래 기술을 과감히 붙잡는 ‘오른손’을 동시에 사용해 조직의 속도를 높이고 사업의 결을 바꾸는 방식이다. 이 전략은 이제 LS를 3년 연속 1조 원대 영업이익, 4년 새 10조 원가량의 자산 증가, 그리고 글로벌 에너지 전환의 대형 플레이어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다. 구자은 회장의 경영 스타일과 성과는 자연스럽게 LS 3세 승계 구도까지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LS의 전략을 읽는다는 것은, 곧 LS의 미래 구도를 읽는 일이기도 하다. 구자은 회장은 LS家 특유의 ‘기술·제조 기반 경영 DNA’를 가장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후손이자, ‘작은 정부·큰 기술’을 외치던 LS가의 경영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경영학보다 기술경영·산업현장의 언어에 익숙하고, 숫자의 흐름보다 미래 산업의 구조 변화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그가 강조하는 ‘양손잡이 경영’도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왼손은 전력·전선·소재·중전기 등 기존 LS의 뿌리 산업, 오른손은 AI·데이터센터·ESS·수소·CFE·배터리소재 등 미래 혁신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두 축을 겹쳐 시너지를 내는 방식이 LS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구회장의 AI에 대한 철학에서도 기술 경영자로서의 확신이 묻어난다. 구 회장은 CES 현장에서 임직원들에게 “AI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라 강조했고, 그룹 차원에서 ‘10년 뒤 LS의 기술’을 직접 그리도록 주문했을 정도다. 그의 리더십이 추상적인 경영철학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숫자’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LS그룹 영업이익은 2022년 1조2040억원을 기록한 뒤 3년 연속 1조 원대를 달성하고 있다. 특히 공정자산은 2022년 26조2000억원에서 올해 35조9000억원까지 무려 10조원이나 증가했다. LS일렉트릭, LS전선, LS MnM 등 핵심 계열사들의 실적이 골고루 좋아졌다는 점도 단순한 호황이 아니라 ‘구조적 성장’의 신호다. LS전선의 미국 1조원대 해저케이블 공장 투자, LS일렉트릭의 북미 ‘배스트럽 캠퍼스’, LS MnM의 니켈·전구체·양극재 밸류체인 구축 등은 모두 양손잡이 전략이 현실로 옮겨진 결과다. 이쯤 되면 ‘양손잡이 경영’은 비유가 아니라 실적을 만든 전략적 프레임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구자은 회장이 취임 1년 만에 공개한 '비전 2030'도 그의 경영철학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LS는 전세계 CFE(Carbon Free Electricity)의 큰 흐름 속에서 가장 큰 기회를 잡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CFE는 탄소 배출 없는 전력을 뜻한다. 이는 재생에너지, ESS, 수소 인프라, 송·배전 솔루션, AI 기반 전력 플랫폼까지 LS가 지난 20년간 구축해 온 사업 구조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LS그룹 전체를 '에너지 전환 인프라 그룹'으로 재정의하고 있으며 이는 20조 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로 이어지고 있다. 구자은 회장이 "2030년, LS를 자산 50조 선도기업으로 키우겠다"고 밝힌 것도 사업 구조적 자신감이 '밑바탕'이 된 셈이다. LS그룹은 오랫동안 형제 경영 전통으로 운영돼 왔다. 그러나 구자은 회장 체제 이후 그룹이 대규모 글로벌 산업 전환기에 들어서면서 차기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현재 재계 안팎에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은 3명이다. 먼저 구본혁 부회장은 1977년생으로 3세 중 가장 연장자다. 그는 과거 고(故) 구자명 LS니꼬동제련 회장의 장남으로, LS전선 해외영업부터 그룹 경영기획, 예스코홀딩스 미래사업본부까지 두루 거쳤고, 최근 예스코홀딩스를 투자형 지주회사로 전환시키며 첫 부회장 타이틀을 얻었다. 그의 강점은 디지털과 투자, 사업 재편 능력이다. LS가 전통 사업과 신사업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에 집중할지’를 판단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구본규 사장은 1979년생으로, LS전선과 LS엠트론을 거쳐 현재 LS전선을 이끄는 실력자다. 3년 연속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킨 전력이 있다. 그는 미국·유럽 중심의 해저 케이블, 초고압 케이블 시장에서 LS를 글로벌 공급망에 안착시키며, 제조와 해외사업, 인프라 산업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실행력을 증명해 왔다. 만약 LS가 송배전·전력 인프라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지키고 강화할 것이라면, 그는 가장 유력한 선택지다. 구동휘 부사장은 1982년생으로, 3세 중에서도 가장 젊지만 LS MnM을 통해 2차전지 소재 사업을 주도하며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그는 LS가 내건 배·전·반(배터리·전기차·반도체) 전략의 핵심 축인 소재 사업을 책임지고 있다. 만약 LS의 미래가 친환경 에너지와 전기화, 배터리 시장 확대에 맞춰져 있다면, 구동휘가 가장 자연스러운 승계 후보다. 세 인물은 각자 LS 그룹의 중추적 사업별 '얼굴'을 대표한다. 구본혁은 투자형 지주·신사업 플랫폼, 구본규는 전통 기반의 전력 인프라, 구동휘는 미래 성장 동력인 배터리·소재 사업이다. 결국 LS의 3세 승계 경쟁은 누가 혈통에서 우선하느냐 보다 어떤 사업을 LS의 차세대 '엔진'으로 만들 것 인가를 두고 성립된 구도로 읽힌다. 구자은 회장이 뿌려놓은 ‘양손잡이’의 씨앗은 이제 수확을 기다린다. 그 씨앗을 누가 누구의 손으로 거둘지가 LS의 다음 10년의 가늠자다. LS그룹 내 '9년 임기 전통'을 감안하면 구자은 회장의 임기는 2030년까지가 된다. 2030년이 가까워질수록 재계와 시장은 더 예민하게 LS의 3세 구도를 주시할 것이다. LS의 미래, 다시 말해 대한민국의 전력·에너지·전기화 시대의 향방이 이들 3세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025-12-15 16: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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