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재계 순위 69위 중견 재벌인 유진그룹이 3세 경영 승계를 앞두고 횡보(橫步)를 거듭하고 있다.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 장남인 유석훈(42) 유진기업 부사장은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가운데 면면이 베일에 가려졌다. 유 부사장은 지난해 상무에서 전무를 건너뛰고 초고속 승진을 맛봤으나 승계는 요원하다.
유진그룹은 지주회사이자 코스닥 상장사인 유진기업, 각각 코스피 상장사인 유진투자증권과 ㈜동양을 제외하면 60여 개에 이르는 계열사가 모두 비상장회사다. 유진기업은 유창선 회장을 비롯한 특수관계인 지분이 38.8%나 되고 총수 일가는 이 회사를 통해 그룹을 지배한다.
유 부사장이 보유한 유진기업 지분은 3.06%로 2016년 12월 이후로 수년째 변동이 없다.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을 하는 유진에너팜을 비롯해 소규모 계열사 지분을 가졌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후계 구도는 몹시 불투명하고 이렇다 할 사업 성과나 전략도 안 보인다.
◆제과회사서 '건자재 1등'으로…여기까진 좋았는데
유진그룹은 다른 여느 기업보다 극적으로 핵심 사업이 바뀐 기업집단이다. 창업주인 유재필 명예회장이 1954년 설립한 대흥제과(현 영양제과)가 시초다. 당시만 해도 건빵을 만들어 군에 납품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군납 특성상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됐고 유 명예회장은 많은 자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
유진그룹은 이를 발판으로 1980년대 시멘트·건설자재(건자재)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한때 재계 순위 40위권에 진입하기도 했다. 밀가루로 시작한 사업이 시멘트로 변모하며 몸집을 불렸다.
유 명예회장은 1985년 장남인 유경선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유 회장은 인천과 경기 부천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레미콘 공장을 잇따라 설립하며 사세를 확장했다. 2016년 말 ㈜동양까지 인수하며 레미콘 시장 점유율 10%를 넘겼다.
지난해 말 기준 지주사인 유진기업은 레미콘·건자재 분야 1위 기업으로 꼽혔다. 가장 최근 공시된 지난해 3분기(4~6월) 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1~3분기(1~9월) 유진기업 연결 매출은 1조872억원에 이른다. 4분기(10~12월) 실적 예상치를 포함하면 연간 매출이 1조4000억~1조5000억원 수준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매출 1조8230억원을 기록한 금융 부문을 포함하면 그룹 전체 매출 규모는 3조원이 훌쩍 넘는다.
최근에는 건자재 유통 사업에 힘을 쏟는 모습이다. 건자재 유통은 철근과 형강, 콘크리트 파일, 바닥재, 타일 등 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사들여 건설사에 공급하는 사업이다. 지난해 3분기 유진기업 전체 매출(별도 기준) 가운데 레미콘(3904억원)에 이어 2621억원을 기록하며 두 번째로 규모가 컸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전 세계 경제를 덮친 공급망 불안은 역설적으로 호재가 됐다. 건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매출 상승으로 이어졌다. 철근을 비롯한 자재가 부르는 게 값이 되면서 건설 현장 곳곳에선 작업 중단 사태까지 빚어졌다. 유진기업은 쌀 때 사서 안정적으로 물건을 공급하는 전략을 취하면서 쏠쏠한 재미를 봤다.
군납 건빵으로 시작해 건설업의 쌀인 시멘트로, 다시 건자재 유통으로 보폭을 확장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성장 신호에 빨간불이 켜졌다. 레미콘·건자재와 금융을 제외하면 마땅한 '캐시카우(현금 창출원)'가 부재한 상황에서 인수합병(M&A)으로 여러 분야에 도전장을 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유진, M&A의 귀재?..."일단 지르고 보자" 전략 한계
유경선 회장은 재계에서 'M&A 귀재'로 불릴 만큼 공격적으로 나섰다. 어떤 기업이 매물로 나오면 가장 먼저 '유진'이라는 이름이 후보로 거론되는 때가 있었다. M&A는 레미콘 기업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유진그룹이 몸집을 키우는 주요한 방식이었다.
전방위에 걸친 M&A 시도는 양날의 검이 돼 지금은 유진그룹 발목을 잡고 있다. 뚜렷한 비전이나 방향성 없이 '일단 입찰 제안서를 던지고 보자'는 식으로 나선 탓에 실패 사례도 적지 않다.
특히 대우건설 인수는 2000년대 들어 첫 M&A 실패 사례로 꼽힌다. 유진그룹은 2006년 대우건설 인수전에 참여하면서 자금 조달을 추진했다. 계열사를 통해 단기 차입금을 들여와 수천억원대 자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실패했다. 경쟁 상대인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자금력 면에서 열세였다. 유경선 회장은 훗날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승자의 저주'에 빠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 만족해야 했다.
대우건설 인수를 위해 마련한 자금은 택배·포장이사 전문기업 로젠택배와 서울증권(現 유진투자증권) 인수에 사용됐다. 당시만 해도 대우건설 인수 실패를 딛고 M&A에 성공하며 물류·금융 분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진그룹은 여세를 몰아 가전제품 유통 전문회사인 하이마트 인수에 도전장을 냈다. 시장에서는 유진그룹이 기존 사업과 큰 연관성이 없는 가전 유통사를 사들이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 회장은 2007년 12월 1조9500억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하이마트를 손에 넣었다.
로젠택배와 하이마트는 얼마 안 가 유진그룹 품을 떠나고 말았다. 체급과 비교해 무리하게 자금을 차입해 M&A를 하면서 부채비율이 급증하는 등 재무건전성에 위험 신호가 켜져서다. 끝내 2010년 8월 로젠택배를 2년 반 만에 재매각하고 2012년 7월에는 하이마트까지 롯데에 넘겼다.
몇 차례나 쓴맛을 봤으나 유 회장은 '문어발 M&A'를 멈추지 않았다. 2016년 2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2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한국자산평가, ㈜동양, 현대저축은행(현 유진저축은행)을 연달아 사들였다. 이 가운데 건설 부문에서 시너지를 낸 ㈜동양을 제외하고 한국자산평가와 유진저축은행은 현재 새 주인을 맞은 상태다. 한국자산평가는 2019년 5월, 유진저축은행은 2021년 7월에 각각 재매각됐다.
유진그룹 M&A 흑역사는 현재진행형에 가깝다. 2020년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전에 발을 담갔지만 결국에는 현대중공업그룹(현 HD현대그룹)에 밀렸다.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에 필요한 자금은 8000억원에 이르렀는데 유진그룹이 보유한 현금자산은 500억원이 전부였다. 터무니없는 자금력에도 무리하게 인수 의향을 밝혔다가 체면만 구긴 셈이다.
두산인프라코어 인수 실패는 유석훈 부사장에게 특히 뼈아픈 기억이다. 유 부사장이 인수전을 주도했다고 알려졌는 데 경쟁 상대가 정기선 HD현대 사장이 되면서 이목을 끌었다. 나란히 오너 3세인 유 부사장과 정 사장은 청운중학교 동창 사이다. 두 사람은 두산인프라코어를 놓고 맞대결을 벌였지만 결과는 정 사장의 완승으로 끝났다.
올해 들어서는 배달 대행 플랫폼 '부릉'을 운영하는 메쉬코리아 인수 작전도 실패했다. 유진그룹은 업종을 불문하고 인수 가능성을 타진해 왔지만 대부분은 무산됐다. 새로운 먹거리를 찾고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하기보다는 섣부른 M&A로 시간만 허비한 결과를 낳았다.
◆2세 '분점 경영'..."3세 유석훈을 위한 자리는 없다"
무차별적 M&A 시도와 실패는 경영권 승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영권 승계는 후계자의 계열사 경영 참여와 지분 확보, 사업 실적 개선과 배당을 통한 자금 마련을 밑바탕에 깔고 이뤄진다. 유석훈 부사장이 가업(家業)을 물려받으려면 이러한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현재 유진그룹 안에서 유 부사장이 존재감을 드러낼 공간은 없다. 유진그룹은 2세 중 맏이인 유경선 회장이 유진기업을 거느리며 레미콘·건자재 사업을 맡았고 창업주 3남인 유창수 부회장이 유진투자증권을 이끈다. 레저·유통 사업을 하는 유진홈센터는 막내 유순태 사장이 맡고 있다.
이들 3형제가 각 사업별로 경영권을 분점한 탓에 유 부사장에게 곧바로 승계가 이뤄지긴 어려운 상황이다. 향후 계열 분리를 거치든 3형제가 승계 문제에 관해 합의를 하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재 맡은 직책과 비교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유 부사장의 한계도 승계 구도를 흐리게 한다. 그는 2015년 3월 유진기업 사내이사에 선임된 이후 이사회에서 활동했으나 어떠한 사업을 주도해 실적을 냈다고 알려진 바는 없다. 유진그룹이 신성장동력으로 삼겠다며 2014년 10월 설립한 에너지저장장치(ESS) 회사 유진에너팜이 있긴 하지만 내부거래 비중이 90% 이상인 데다 경영 성과도 좋지 않다.
유 부사장과 관련한 '깜깜이 승계'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동철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영권 승계는 그 기업에서 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이어 "무차별적 M&A는 때에 따라 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방법이지만 계열사가 너무 많아지면 자원이 과하게 소모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