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기업을 일으키기는 어렵지만 이를 반석 위에 올려 번창시키기는 더 어렵다. 예로부터 여러 왕조의 창업 군주와 더불어 치세를 한 군주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후계자를 정하는 창업주는 고심을 거듭하고 때때로 상속 분쟁이 이어진다. 기업 승계 구도를 보면 한 국가의 경제 체제와 기업문화를 엿볼 수 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기업집단 10곳 중 7곳은 승계 중…막 오른 '大승계시대'
②'삼성 마지막 후계자' 이재용, 지배구조 개편 묘수는
③SK그룹 "분쟁·계열분리 없다"…3세 승계 방향타는 어디로
④4세 '烘의 시대' 준비하는 GS그룹...9명 승계 레이스 '시동'
⑤HD현대, 3세 정기선 '오너 경영' 부활 요건은 '자금'과 '가신'
⑥두산, '뿌리 깊은 나무' 될까…시련 딛고 '승계 전통' 잇는다
<계속>
두산그룹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될 수 있을까. 두산은 국내 대규모 기업집단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풍파가 많았다. 매헌(梅軒) 박승직이 1896년 '박승직상점'을 연 것을 시작으로 127년간 회장만 10명에 이른다. 정부에 의한 강제 사업 철수, 구조조정, 경영권 분쟁 등 다른 기업이 겪은 온갖 사건을 두산 한 곳이 다 경험했다.
오랜 구조조정 터널을 지난 두산은 4세 경영에 돌입한 상태다. 박승직 회장의 손자이자 9대 두산그룹 회장을 지낸 박용만 회장을 끝으로 박정원 회장이 2016년 3월 취임하며 4세 시대를 열었다. 아직 이른 감은 있지만 11대 회장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 형제 경영 전통이 분수령을 만날 것으로 보인다.
16일 재계에 따르면 차기 회장으로 유력한 인물은 단연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대표이사 회장이다. 박지원 회장은 두산그룹 부회장이기도 하다. 그는 3·5대 두산그룹 회장을 지낸 고(故) 박용곤 회장의 차남으로 박정원 현 회장의 친동생이다. 박정원에서 박지원으로 회장직이 승계되면 4세에 이르러서도 형제 경영 전통은 유지된다.
박지원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지주회사인 ㈜두산 주식을 다량 매입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박 부회장이 매수한 주식은 6만3385주에 이른다. 이로써 그가 보유한 ㈜두산 지분은 4.94%에서 5.32%로 늘었다. 경영권 승계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평가가 많다. 박정원 회장이 1962년생으로 갓 환갑을 넘겼기 때문에 내년 임기가 끝나더라도 연임 가능성이 있다.
◆109년 만에 일어난 '형제의 난'이 남긴 교훈
두산그룹은 박승직 창업주의 장손인 고 박용곤 회장이 1981년 취임한 이후 형제 경영 전통을 유지했다. 박용곤 회장 아들 6명 중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을 뺀 5명이 차례로 회장을 맡았다. 형제가 각 계열사 요직을 거치며 경영에 참여하다 일정한 때가 되면 자리를 물려받는 식이었다.
전통은 20년 넘게 잘 지켜지는 듯했으나 2005년 한 차례 깨질 뻔했다. 박용곤 전 회장이 가족회의를 통해 박용오 당시 회장에게 경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박용오 회장은 이를 거부했고 다른 형제들이 큰 형인 박용곤 회장 뜻에 따르면서 경영권이 박용성(박두병 3남) 회장에게로 넘어갔다. 두산그룹 창업 109년 만에 형제 간 경영권 분쟁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박용오 전 회장은 2005년 7월 한국야구회관에서 승계에 정당성이 없다며 불복하는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박용오 회장은 동생인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당시 ㈜두산 부회장이 수천억원에 이르는 비자금을 조성해 사적으로 쓰고 일부는 해외에 밀반출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형제들은 박용오 회장이 두산산업개발(현 두산건설)을 계열 분리해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기를 든 것이라고 맞섰다. 일가의 공동 경영과 형제 간 승계 원칙을 깨뜨리려 한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두산건설은 두산중공업과 더불어 핵심 계열사였다.
양측 간 공방은 결국 검찰 손에 넘겨졌다. 박용오 회장은 "박용성·용만 형제가 일삼은 불법 행위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두산건설만이라도 떼어 가겠다고 한 것"이라며 동생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나머지 형제들은 박용오 회장을 일가에서 제명하기에 이르렀다. 서로를 향한 폭로전이 진행되는 중에 검찰은 두산 오너 일가가 300억원에 이르는 회삿돈을 횡령하고 2800억원 규모 분식회계가 진행된 사실을 밝혀냈다.
형제의 난 결말은 당사자 모두가 상처를 입는 결과를 낳았다. 법원은 사건의 중심인 박용오·용성·용만 3형제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박용성·용만 형제는 경영에서 물러났고 두산을 떠난 박용오 전 회장은 성지건설을 인수해 독립했다. 그러나 성지건설은 2008년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건설업이 위기에 빠지면서 경영난을 겪었다. 박용오 회장은 끝내 2009년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두산그룹 형제의 난은 현대그룹 '왕자의 난'과 비견될 만큼 비극적으로 마무리됐다. 나무의 뿌리가 아무리 깊어도 가지가 많으면 바람 잘 나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겼다.
한편 두산그룹 3세 중 막내인 박용욱씨는 가구 제조, 호텔 운영,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사업을 하는 이생그룹으로 독립해 형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형들 사이에 벌어진 분쟁을 모두 지켜본 그는 박용만 회장에 이어 10대 회장에 오르기를 거절하고 홀로서기를 택했다. 이로써 두산그룹은 박용만 회장을 끝으로 3세 시대를 마감하고 박정원 현 회장 취임으로 4세 시대를 열었다.
◆한층 멀어진 촌수(寸數), 박정원-박지원 그 다음은?
박정원 회장이 추후 동생인 박지원 부회장에게 자리를 넘긴다면 마지막 형제 간 승계가 된다. 그 이후에는 2촌인 친형제가 아닌 삼촌의 자녀, 즉 4촌 형제에게 경영권을 물려줘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짧은 기간에 5세 승계로 넘어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4세 경영 체제에서는 4촌 간 승계가 가장 유력하다.
박정원 회장이 취임한 2016년은 두산그룹에게 가혹한 시기였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8년 그룹 모태와 다르지 않은 오비(OB)맥주를 매각한 데 버금갈 정도로 냉혹한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다. 두산그룹 구조조정은 20년 넘게 진행 중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큼 긴 기간 진행 중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다. 2020년 이전까지 두산그룹은 건설·플랜트·건설기계 등이 주요 사업이었는데 이들 사업이 모두 부진했다.
두산중공업은 자금 사정이 급격히 어려워지며 2020년 6월 한국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채권단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체결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탈(脫)원전 정책으로 신규 원자력 발전소 건설 사업이 줄줄이 중단되거나 보류되면서 원전 설비·부품 제조가 주 사업인 두산중공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기후변화로 인한 탄소중립이 세계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석탄화력 발전설비 사업도 타격을 입었다.
당시 정부에 우호적인 쪽에서는 회사 매출 중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10~15%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들어 경영진 무능 탓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두산중공업은 2년여 만인 지난해 2월 채권단 관리 체제를 졸업했다. 이 과정에서 회사 측은 임원을 30% 줄이고 400명에 이르는 직원을 계열사로 전출했다. 자회사인 두산인프라코어는 HD현대그룹으로 매각됐고 보유 자산 다수가 매물로 나왔다. 또한 두산에너빌리티로 사명을 바꾸고 수소·전지 등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했다.
이 무렵 그룹 경영 상황도 좋지 않았다. 두산중공업 재무 개선에 막대한 자금이 쓰이면서 그룹 전반으로 여파가 미친 탓이다. 두산그룹이 최근까지 재무구조 개선 차원에서 매각한 계열사 자산만 3조1000억원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두산에너빌리티가 보유한 두산건설 지분도 46%만 남기고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큐캐피탈에 매각했다.
두산그룹은 윤석열 정부 들어 원전 사업 부활을 노리고 있다. 이전 정부 탈원전 정책으로 중단된 신규 원전 사업이 재추진에 들어갔고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비롯한 해외 수출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14일(현지시간) 윤 대통령과 함께 UAE를 방문한 경제사절단 100명에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회장(두산그룹 부회장)이 이름을 올리면서 수주 기대감이 커졌다.
원전 분야 이외에 두산퓨얼셀을 중심으로 수소연료전지 사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두산 완전 자회사로 2016년 출범한 두산모빌리티이노베이션은 드론을 활용한 무인 배송 시장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다.
박정원 회장으로서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훨씬 수월하게 경영권을 승계할 수 있을 전망이다. 재무구조 개선과 사업 구조 개편 작업이 마무리되면서 차기 회장이 짊어질 부담이 줄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승계 1순위인 박지원 부회장은 두산에너빌리티를 잘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부동산 임대 사업을 하는 두산프라퍼티와 건설장비 등을 제조하는 두산밥캣, 두산퓨얼셀 등을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다. 박지원 부회장은 그룹 핵심을 장악한 셈이다. 그가 역점을 둔 가스터빈, 수소, 해상풍력, 소형모듈원전(SMR) 등 4대 사업 귀추에 따라 차기 승계 구도가 확실해질 가능성이 크다.
한편 박정원 회장 장남인 박상수씨가 ㈜두산 지분율을 0.8%까지 끌어올리며 주목을 받았다. 두산가(家) 5세 가운데 맏이로 1994년생인 박씨는 아직 계열사에 입사하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4촌 간 승계로 갈 가능성이 크지만 장기적으로 5세 시대를 대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