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두산그룹이 창립 100주년을 맞은 1996년 1월 한국기네스협회는 이 회사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인정했다. 두산은 그로부터 다시 30년 가까운 시간을 더해 127년이라는 세월을 버텨냈다. 두산은 국내 대규모 기업집단 가운데 유일하게 19세기에 들어선 회사로 독보적인 최고(最古) 기업 타이틀을 보유했다.
두산은 국내 기업사에서 환골탈태의 교과서라 불릴 만큼 빠르게 모습을 바꿔 가며 지금에 이르렀다. 포목점에서 시작해 소비재 위주 사업을 하다 중공업을 거쳐 에너지 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에 비견될 만큼 과감한 구조조정은 위기 때마다 빛을 발했다.
◆종로의 보부상, 식민지 조선에서 거상이 되다
국내 재계 순위 상위권을 다투는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두산그룹도 처음에는 작은 상점에 불과했다. 창업주인 매헌(梅軒) 박승직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옷감 따위를 팔던 보부상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지만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고 일찍부터 장사에 눈을 떴다. 몰락한 양반으로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점도 상인의 삶을 택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박승직이 처음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상점을 차린 때는 1896년 8월이었다. 같은 해 갑오개혁으로 금난전권(禁亂廛權)이 폐지되면서 지금의 서울 종로4가 인근인 배오개에 터를 잡고 포목을 팔았다. 금난전권이란 조선 후기 한양도성 안팎에서 아무나 장사를 못하게 막는 규제다. 상인 중에서도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에게만 장사를 허락하고 특권 상인 집단에 그 권한을 부여한 진입장벽이었다.
박승직상점은 승승장구했다. 1905년 무렵에 이미 거상으로 성장했고 일제강점이 이후에는 당시 경성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됐다. 판매 물품은 옷감에서 화장품으로 늘어났다. 이 무렵은 서양식 화장품이 여성들에게 급격하게 인기를 얻었는데 박승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30년대에는 맥주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유행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상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신용을 지킨 점이 성장 비결이었다.
일본이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식민지 조선이 전시 총동원 체제에 들어가자 박승직은 상점을 정리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질수록 조선의 경제는 더욱 황폐해졌고 매출과 이익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박승직상점은 '두산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문을 열었다. 두산(斗山)은 '한 말씩 쌓아 산을 이룬다'는 뜻이다. 보부상 출신으로 상점을 열고 품목을 차츰 늘려간 50년을 함축하는 단어였다.
◆유행을 읽어내는 능력, 세 번에 걸친 환골탈태
박승직이 1950년 숨을 거두고 두산상회는 그의 장남인 박두병이 맡았다. 박두병이 이끄는 두산상회는 주식회사로 출범하며 상점이 아닌 기업으로서 면모를 갖춰 나갔다.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은 동양맥주를 인수한 데 이어 무역업과 운수업으로 업종을 바꿨다. 옷감과 화장품에서 사업 구조를 전환한 것이다.
박두병 회장은 소비재를 중심으로 사업 영역을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 맥주 사업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외에서 유명 브랜드 제품을 들여와 국내에 공급했다. 코카콜라, 네슬레, 쓰리엠(3M), 코닥, 폴로 등 1960~1990년대 국내 소비 시장을 주름잡은 브랜드는 대부분 두산을 통해 소개됐다.
소비재 중심 사업 구조는 경제 개발이 한창인 시기 그룹을 빠른 시간 안에 성장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1960년대 초 100달러 수준인 1인당 국내총생산(GDP)가 1995년 1만 달러로 100배 급증하면서 자연스레 기호식품과 패션 의류 수요가 늘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부터 시작된 전산화·정보화는 필름 카메라 대중화와 저장장치 보급을 이끌었다. 두산은 언론·출판업 진출과 프로야구단 창단으로 볼거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켰다.
소비재 기업 두산은 2000년을 기점으로 다시 한 번 변화를 맞는다. 2001년 한국중공업(현재 두산에너빌리티)을 인수하며 이른바 중후장대 산업에 발을 들였다. 1998년 외환위기(IMF)를 겪으면서 소비재 시장이 붕괴 수준으로 추락하고 맥주 사업(OB맥주)을 비롯한 비수익 사업을 정리했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에너지·건설장비를 위주로 한 중공업 회사로 체질을 바꿨다. 옛 두산인프라코어 전문경영인인 최승철 전 사장은 "IMF가 두산을 살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위기 속에서 환골탈태로 재도약을 이끈 인물은 박용만 전 회장이다. 박용만 회장은 집안 전통인 형제 간 경영 승계 원칙에 따라 형인 박용성 전 회장(박두병 3남)에 이어 그룹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경영권 분쟁을 겪기도 했다.
다음 번 위기는 중공업 기업으로 정체성을 바꾼지 오래되지 않아 닥쳤다. 두산그룹은 외환위기 때부터 20년 넘게 비수익 사업 매각과 신사업 진출을 거듭하며 장기간 구조조정을 해왔는데 2010년대 중반 건설과 플랜트, 건설기계 등 사업 부진이 본격화하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건설 경기 위축과 정부 정책 기조에 따른 원자력 사업 침체가 원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두산그룹은 두산인프라코어를 HD현대그룹으로 떠나 보내야 했다.
구조조정 시기 후반에 경영을 맡은 박정원 회장은 수소연료전지와 건설기계를 앞세웠다. 다행히 원자력 사업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비롯한 중동 수출이 활발해지고 국내 신규 원전 건설이 재개되며 점차 탄력을 받고 있다. 원자력·수소 등 에너지와 건설기계 위주의 모빌리티는 두산이 새로운 먹거리로 꼽은 분야다.
박승직상점 이후로 현재까지 130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며 두산그룹은 세 번에 걸쳐 변신했다. 누구나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를 말하지만 이를 기업 경영으로 보여준 사례는 흔치 않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기술 혁신으로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과정을 '창조적 파괴'라고 했다. 또한 창조적 파괴를 주도하는 경영인을 혁신적 기업가라고 정의했다. 박승직 이후 박정원 회장에 이르기까지 두산 127년에는 이러한 유전자가 내재됐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