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전쟁은 비극이다.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 만들어지는 장치가 협약이나 국제기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이념 대립으로 조성된 냉전시대,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 위협에 맞서 1949년 서방국가들이 결정한 집단방위협약체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다.
지난 11일(이하 현지 시간) 열린 나토 정상회의는 여러모로 뜻 깊은 국제회의였다. 먼저 회의 장소가 과거 나토와 대립한 동유럽 국가였던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다. 1990년대 구소련 붕괴 후 동유럽국가들이 잇따라 경제공동체 유럽연합(EU)과 안보공동체 나토 가입으로 공동 경제 발전과 안전망 구축을 도모한 결과다. 대다수 동유럽 국가들이 이미 유럽연합(EU)이나 나토 회원국이란 점에서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고립이 심화되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조바심과 역정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반작용이 더 컸다. 푸틴은 '세계의 빌런'으로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오히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놀라 그간 나토 가입에 미온적이던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 가입을 신청했다. 지난 4월 먼저 핀란드 신청이 받아들여졌고 그간 스웨덴 나토 가입을 반대해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러시아의 바그너그룹 반란 이후 친(親)나토로 입장을 선회하며 스웨덴 가입에 찬성, 스웨덴은 200년 넘게 지켜온 중립국 지위를 내려놓게 됐다.
스웨덴이 나토의 32번째 회원국으로 확정되면서 가장 애간장이 타게 된 사람이 이번 정상회의에 초청받아 참석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다. 그간 나토 가입으로 자국의 안전보장을 받길 그리도 원했으나 "가입 절차 투 스텝을 원 스텝으로 줄여주고 전쟁이 끝난 뒤 초청하겠다"는 약속만을 받아냈다. 러시아와 계속 싸울 무기 패키지 선물과 함께. 격노한 그의 트윗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로부터 "감사할 줄 모른다"는 반응을 불러왔다. 젤렌스키는 결국 한수 접고 감사의 표시를 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전장에서 마치 '유럽 대표 선수' 같은 입지에 서서 러시아의 서진(西進)을 막고 있지만 나토에 합류시켰을 경우 전체 나토가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미국, 독일의 반대로 나토 가입 일정 잡기에 실패한 것이다. 급실망한 젤렌스키의 얼굴에서 고종의 얼굴이 겹쳐 보인 것은 왜일까. 이는 고종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3인의 특사를 파견했으나 러시아와 일본의 장난질로 회의 참석이 무산된 채 한일 합방을 맞아 주권을 찬탈당했던 우리 역사의 아픔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번 나토정상회의에 초청을 받아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과 함께 '아시아태평양(TP) 4개국 참석'이란 모양새를 갖추며 대서양·태평양 안보연대를 이뤘다. 이 연대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러시아와 한층 밀착한 중국, 북한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나토정상회의에 참석해 나토와 △정무군사 분야 정례 회의 개최 △대테러 역량 강화협의체 설치 추진 △한국군의 나토 주도 훈련 참여 추진 △사이버훈련 참여 확대 등 각종 파트너십 프로그램에 합의하고 12일 하루 동안 네덜란드 등 7개 정상과 연쇄회담을 가진 뒤 폴란드 국빈방문을 했다. 과거 헤이그 특사 3인이 받았던 푸대접에 비할 수조차 없는 대접의 차이는 지난 100년 동안 격상된 우리나라의 위상에 있다 할 것이다.
논란 끝에 민간살상 우려가 큰 집속탄까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서방 무기는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 다만 공동 안전망에 끼어주는 것만 제외하고. 우크라이나란 나라를 구소련 해체 이후 생긴 신생국가로 아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알고 보면 우크라이나는 몽골 침략 전까지 독립을 영위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후예들이 살던 유서 깊은 문화와 역사, 독립의 열망을 가진 나라다.
구소련 해체 후 우크라이나가 졸지에 미소(美蘇)에 이어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 되자 1994년 미국과 러시아, 영국이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평화를 보장하는 부다페스트안전보장각서를 체결해 핵무기를 러시아로 옮겼다. 그 각서에 미·영의 자동 군사개입조항이 있었더라면, 우크라이나가 지금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보다 컸더라면, 서방이 우크라이나에게 무기를 한 아름 안기며 싸워 이기면 나토에 가입할 수 있다는 약속을 했을까. 이번 나토정상회의는 자국의 평화와 안정이 가장 중요시되는 국제 사회의 냉정한 원칙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지금 우리나라가 가진 안보조약과 위상을 지켜야 할 당위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전쟁 같은 정상회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