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대형 조선사는 선별 수주로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한층 강화할 방침이다. 쉽게 말하면 돈 안 되는 배는 과감히 포기하고 선가가 높은 물량만 수주하겠다는 것이다. 액화천연가스(LNG)나 암모니아를 연료로 사용하는 이중연료 추진선과 초대형 가스 운반선(VLGC)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통상 공급 사슬의 최정점에 있는 기업이 잘 나가면 그 밑에 있는 기업도 혜택을 얻는 낙수효과가 일어나지만 현재 조선업은 그렇지 않은 모양새다. 일감이 넘쳐나 인력과 도크가 부족한 상황에서 대형 조선사가 내놓은 해법은 해외 진출이다.
지난 2021년부터 이른바 '빅3'의 수주 랠리가 시작되자 부산·울산·경남에 둥지를 튼 중형 조선사는 내심 '블록' 물량 수주를 기대했다. 블록은 중간 조립 형태를 말하는데 여러 블록이 합쳐져 선박 한 척을 이룬다. 대형 조선사는 블록 제작을 중형사에 맡기기도 한다. 그 밑에는 엔진·탱크와 관련 부품을 제작하는 기자재 업체가 있다. 그러나 대형 조선사가 소화하지 못하는 일감 중 일부만이 중형 조선사로 넘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형 조선사가 자체적으로 선박 발주에 응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선수금 환급 보증(RG)을 받아내는 게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까워서다.
대형 조선사와 비교해 운용 자금이 부족한 중형 조선사는 건조 계약 시점에 선수금을 받아 공사에 착수하고 이후 단계별로 대금을 받아 배를 짓는다. 조선사가 약속대로 선박을 완성하지 못하면 RG를 발급한 금융사가 대신 선수금을 환급한다. 정부는 지난 4월 RG 특례보증 비율을 85%로 높였으나 중형 조선사들은 공격적인 수주에 나서기에 여전히 부족하다는 반응이다.
금융사가 RG 발급을 꺼리는 데에는 중형 조선사의 누적된 실적 악화도 있지만 무엇보다 과거 수천억원대 선수금 환급에 따른 손실 경험이 한몫한다. 일례로 한 시중은행은 지난 2009년 중형 조선사 한 곳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600억원에 이르는 보증금을 물어줘야 했다. 이 무렵 C&중공업, 대한조선, 진세조선 등 다수 조선사가 기업회생 등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금융사 입장에서 RG는 '리스크'다.
이런 가운데 중형 조선사는 수주난에 더해 인력난, 원자잿값 상승까지 삼중고를 겪고 있다. 여기에 중국 조선사가 국내 중형 조선사의 주력 선종인 중·소형 탱커, 컨테이너선 등 발주 물량을 낮은 가격에 쓸어 담는 상황이다. 올해 3분기까지 케이조선·대선조선·HJ중공업 등 중형 조선사 3곳의 누적 영업손실은 총 2200억원에 이른다.
조선업 생태계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금융 지원과 함께 중형 조선사의 설비와 기술·인력을 고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조선·해운업에 대한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노후 선박 교체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중형 조선사도 여기에 대응할 여건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는 중형 조선사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오는 2027년까지 1500억원을 들여 스마트 조선소 전환을 지원할 계획이다. 또한 2000억원을 투입해 LNG·암모니아 등 저탄소 연료 기술 상용화를 추진한다. RG 발급과 관련해서도 한국무역보험공사의 특례보증을 활용해 한도 부족을 해소한다는 방침이다.
일각에서는 대형 조선사가 더 적극적으로 상생 노력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대형 조선사들이 인력 부족을 중형 조선소에서 빼간 것으로 해결한 데서 보듯 생태계에는 무관심한 게 사실"이라며 "적극적으로 임금을 높이고 인력을 양하는 등 대형 조선사가 바뀌어야 한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