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탈을 개간한 밭에 바람이 분다. 어린 형제가 고사리손으로 잡은 검은 비닐은 이리저리 나부끼고, 햇빛을 담아 마치 파도처럼 출렁인다.
곡선으로 휘어진 고랑은 늙은 아버지의 주름만큼 깊이 파이고, 오직 먹고살기에 목매던 그날의 순간은 고스란히 작품에 담긴다.
남춘모 작가의 '스프링'연작은 당시만큼이나 찬란하고 치열하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리안갤러리 서울은 단색 '부조회화'의 대가 남춘모 작가의 개인전 'Tchunmo Nam'을 1월 17일부터 3월 30일까지 연다.
리안갤러리 서울이 올해 첫 전시로 남춘모 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외국에서의 심상치 않은 러브콜 때문이다.
안혜령 리안갤러리 대표는 지난 17일 기자간담회에서 "지난해 대구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 이후 작품을 보러 해외 갤러리들이 엄청나고 오고 있다" 며 "3월에 예정돼 있던 전시를 1월로 당겼다. 해외 갤러리들이 3월 홍콩 아트 바젤에 맞춰 남 작가의 작품을 보고 싶어 했다"고 설명했다.
남춘모 작가의 해외 개인전이 6월 9일부터 8월 20일까지 독일 코블렌츠에 있는 루드비히미술관에서 있는 것도 전시를 서두른 이유다. 일찌감치 국내 전시를 통해 작품의 기대치를 높이고 6월 진시에 집중한다는 계산이다.
남춘모 작가는 "루드비히미술관 관장이 지난해 대구미술관 전시를 와서 보고 설치 작품을 거의 선정했다" 며 "요즘하고 있는 드로잉부터 조각, 설치 작품까지 전부 전시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남 작가는 이어 "해외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처음이다. 좀 더 나은 활동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서라도 중요한 전시이고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전시가 될 것이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리안갤러리는 남춘모 작가 외에 올해 김택상, 윤희 작가와 전속 계약을 했다. 이건용 작가 또한 전속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지만, 리안갤러리를 중심에 두고 페이스갤러리와 현대갤러리에서 활동할 계획이라는 것이 안혜령 대표의 설명이다. "올해 두 작가를 더 영입했다. 전속 개념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갤러리로 모범을 보이고 싶다"
▶대구에서 시작된 남춘모 작가와 안혜령 대표의 인연
대구 출신인 안혜령 대표는 남편의 조언을 듣고 1984년도부터 그림을 사는 컬렉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미술시장은 굉장히 열악해서 '갤러리가 한 작품을 팔아서 일 년을 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컬렉터가 그림을 사면 갤러리 대표와 작가가 직접 그림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안 대표는 당시 대구의 시공갤러리에서 그림을 자주 샀고, 갤러리 대표와 함께 그림을 가지고 온 남춘모 작가를 처음 봤다.
남춘모 작가는 "시공갤러리에서 유일하게 작품을 샀던 분이 안혜령 대표였다. 그 당시 작품을 배달 갔더니 집안에 어마어마한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있었다" 며 "그때 안 대표를 처음 만났고 당시 저는 완전히 무명이었다"고 회상했다.
안 대표가 문을 닫은 시공갤러리를 인수해 리안갤러리로 문을 연 지 12년이 됐다. 6년 전에는 서울에 진출해 리안갤러리 서울을 세웠다.
안혜령 대표와 남춘모 작가가 갤러리 대표와 전속 작가로 만난 것은 4년 전이다.
서구화된 그림보다는 한국적인 것이 바탕이 있는 작가를 원했던 안 대표는 과거 무명이었던 남춘모 작가를 떠 올렸다.
안혜령 대표는 "한국적인 색깔, 한국적인 것에 기본이 되고 해외 나갔을 때 한국적이면서도 동양의 선이 있는 이런 작가들을 최우선으로 선택하고 있다. 남춘모 작가도 그런 의미에서 전속 작가로 했다"고 강조했다.
남춘모 작가는 지난 4년간 리안갤러리의 지원으로 큰 성과를 이뤘다.
지난해 마이메미 아트페어에서도 남춘모 작가의 작품만 2점이 팔렸으며, 해외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과 작품 제작 방식에 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남춘모 작가의 '부조회화'
남춘모 작가는 단색의 '부조회화'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 방식과 형식을 구축했다.
서구에서는 추상회화가 발달하면서 평면의 고유한 2차원성을 강조하는 데 반해 남춘모 작가는 회화라는 고유 영역을 지키면서도 평면이 아닌 부조라는 형식을 취해서 3차원적인 형식으로 작품을 발전시켰다.
성신영 리안갤러리 디렉터는 "그는 회화와 조각의 경계 구분이 없이 그것을 합치시켜서 하나의 '부조회화'로 발달시켰다" 며 "모듈화된 모습을 반복적으로 시행하는 것을 보면 미니멀리즘 영향을 받았지만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간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단색화가 큰 화두가 됐다. 전 미술사를 통틀어서 봐도 어떤 국가의 파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것은 몇 개 없었다. 그만큼 한국 미술의 위상이 높아졌다.
남춘모 작가는 자신이 단색화 작가로 불리는 것에 관해 수긍했다. "1세대 단색화 작가들이 제 선생님들이자 선배 작가들이다. 제가 작가로서 지금까지 살아온 작가적 태도에도 그분들의 영향이 많다. 단색화 작가다 아니다를 떠나서 이미 그분들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남 작가는 단색화를 넘어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강조했다. "(단색화는) 그분들의 세대로써 끝났으면 좋겠다. 저는 이후에 또 다른 것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 더 나은 확장을 추구해야지 그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작가의 작품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자연주의다. 그의 작품에는 빈틈이 많고 일률적이지 않다. 그것이 한국적인 정서로 연결된다.
성신영 디렉터는 "서구 추상화는 자로 잰 듯이 일직선을 그어서 이성적 논리적인 형태를 추구한다. 하지만 작품을 언뜻 보면 그냥 직선처럼 보이는 선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 며 "심지어 작가는 현실 공간과도 소통한다. 관람객의 위치와 시선의 이동에 따라 변화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건물 뼈대인 H빔에서 따온 'ㄷ'자 모듈, 작품의 근간이 되다.
2007년부터 시작한 그의 '빔'(Beam) 시리즈는 '스프링'(Spring)과 '스트로크'(Strokes)시리즈로 이어지면서 여러 가지 변주를 낳았다.
부조회화를 이루는 최소 단위는 한글의 'ㄷ'자 모양의 모듈(module)이다. 광목천(면직물)을 'ㄷ'자 형태 틀에 고정해서 폴리코트(합성수지)로 딱딱하게 굳힌 다음에 그것을 일정 길이만큼 잘라서 아크릴로 반복적으로 붙여서 형태를 만든다.
남춘모 작가는 "ㄷ자 모양은 현대 건축물의 뼈대를 만드는 H빔에서 따왔다. 현대 건축물에서 인테리어 장식을 다 떼버리면 실제로 남는 것은 H빔 골조다" 며 "제 작업에서도 군더더기를 다 제거하면 ㄷ자 모양 골조만 남는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H빔의 구조에서 캔버스에 붙일 수 있게 한쪽 부분을 잘라내고 돌출된 부분을 위로 향하게 하여 'ㄷ자' 형태를 가져오게 됐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측할 수 없다. 'ㄷ자' 모듈의 길이도 제각각일뿐더러 밑그림도 없이 붙여 나가기 때문이다.
"그냥 붙여 나가기 때문에 다 해서 걸어 놨을 때 비로써 완성된 작품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계획적이고 맞춰서 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ㄷ자'를 붙이는 곡선이 갑자기 급속하게 접어들면 방향이 바뀌곤 한다"
▶선에서 창조해 낸 입체, 모든 빛의 변화를 담다.
그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선'과 '빛'이다. 바다에서 파도가 일렁이듯 그의 작품은 빛에 따라서 살아 숨 쉰다.
"많은 작가가 선을 이미지로 만들어 부수적인 수단으로 쓴다면 저는 선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선대 작가들이 화선지 위에다가 몇 개의 선만으로 여백의 공간감을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저도 선의 공간감을 끌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아예 선에다가 입체를 만든 것이다."
작품을 입체로 만들다 보니 빛에 대한 문제가 새롭게 다가왔다. 빛의 거리와 시간에 따라서 생기는 그림자들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인상파 작가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쫓아서 하나의 대상을 아침, 점심, 저녁에 걸쳐 여러 번 그렸지만, 저는 입체로 된 한 화면에다가 빛의 변화를 전부 담았다. 작품을 야외 자연 공간에다 걸어 놨을 때 그 주변에 있는 풍경들하고 너무나 잘 어울린다."
▶아버지, 형과 같이했던 고된 밭일, '스프링' 시리즈로 탄생
'밭이랑'이 생각나는 '스프링'(Spring) 시리즈는 작가의 어릴 적 기억 일부에서 시작됐다.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작가는 학교 가는 것보다도 부모·형제들과 함께 개간한 산비탈 밭에서 풀뿌리를 골라내는 것이 일과였다
"이랑을 만들고 주변의 작물을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 보온 덮개로 검정 비닐을 이랑 위에 덮었다. 저는 잡고 있고 형이나 아버지가 검정 비닐을 끌고 고랑 끝까지 갔다. 비닐이 바람에 펄럭거리면서 생기는 그 잔상들이 어릴 때 추억이 남아서 이랑 같은 곡선이 작품에 투영됐다."
전시장 중앙에는 '부조회화'가 아닌 지름 3m가량의 '스프링빔'(Spring-beam) 설치 작품이 놓였다.
"설치 작업은 2년 전부터 해오고 있다. 선들이 공간을 가지고 입체가 되다 보니까 평면 위에 걸릴 때도 있고 그걸 좀 더 확대해서 조각이나 설치로 확장했다."
작가는 산비탈 황무지를 개간할 때 늘 불만이었다고 한다. 학교도 못 가고 일을 할 때는 그곳에서 뭐가 나올까 생각하며 투정을 부렸지만, 지나고 나니까 황무지 위에 선 농부의 마음이나 지금 작가의 마음이나 똑같다고 한다.
"저도 제 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잘 모르겠다. 늘 결과보다도 현실의 풀뿌리를 골라내듯이 그런 자세로 작업을 하고 있다. 아마 모든 작가가 그럴 것이다. 시장의 논리와 상관없이 작가는 작업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