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재'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개그맨을 떠올린다. 전시회를 열면 멋지게 옷을 입고 온 관람객들이 '이휘재 어디 있느냐?'며 전시장은 시끌벅적한 시장통 분위기가 된다. 정작 남자가 아닌 여자 작가가 나타나면 작품도 안보고 화를 내며 나가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후 이휘재 작가는 본명을 못 쓰고 '이피'가 됐다.
롯데갤러리 잠실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지난 1일 만난 이피 작가는 "여권에 있는 영문 이름이 Fi Jae Lee(휘재리)이다. 미국에서는 친구들이 피(fi)로 불러서 그냥 피로 쓴 것이 이피이다" 며 "사람들이 '블러드(피·Blood)냐?'며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롯데갤러리 잠실 에비뉴엘 아트홀과 롯데갤러리 영등포점에서 독특하면서도 기이한 상상의 세계를 담은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피(본명 이휘재·38) 작가의 개인전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을 각각 2월 1일부터 2월 24일, 3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는 드로잉, 회화, 조각, 설치작업 등 작가의 최근작 약 40여 점을 선보인다.
▶비범했던 미술 천재,힘들었던 학교생활
독특한 이름과 어울리게 그는 책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동물을 좋아한다. 연극을 하는 아버지와 시를 쓰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피 작가는 쉽게 많은 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중국 산해경을 통해서 많은 상상 속의 동물을 접하고 '눈, 코, 입을 찾아 떠난 사람' 전시(1997)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때 신화를 읽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특히 산해경을 보다 보면 굉장히 얼토당토않은 내용이지만, 그 당시의 사회상을 담고 있다. 아이들이 많이 죽고 홍수가 나고 온갖 괴상한 동물이 다 나온다. 그래서 작품도 그런 것들에서 출발했다."
일찍 재능을 발휘하면서 작가로서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그는 오히려 쉬워 보였던 학교생활에서 큰 난관에 부딪혔다.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었던 그는 영어를 쓰는 미국에 가서 진짜 이방인이 됐다.
"그 당시에는 영어도 잘하지 못하고 너무나 미국에서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시카고트리뷴을 구독하고 거기에 매일 일기를 썼다."
이방인으로서의 상처를 시카고트리뷴에 써서 상자에 붙여 나갔는데 그것이 한국에서 따라온 나방같이 보였다고 한다. 이것이 조각 작품 '나의 나방'의 탄생 배경이다. 미국 유학 생활을 끝내고 2009년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 제작한 것도 '나의 나방'을 회화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롯데갤러리 잠실 에비뉴엘 아트홀에는 새로 제작한 '나의 나방'(2019) 조각 작품과 '나의 나방'(2009) 회화 작품이 나란히 전시됐다.
가로, 세로, 높이가 2m가량 되는 '나의 나방' 조각은 나방의 형체를 한 사람이 온몸에 가시를 두른 채 서 있는 모습이다.
"미국에서 만들었던 초기작 '나의 나방'은 시카고의 강풍에 날아갔다. 그 조각을 기리기 위해서 회화 작품을 만들었고 최근에 다시 조각으로 재현했다. 가시는 미국에 처음에 갔을 때 힘든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미국서 '나방'이 한국에서 '오징어'가 되다
미국에서 완전히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작가는 처음 미국에 도착할 때만큼 큰 괴리감을 느꼈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인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나이, 선후배 등 관계와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심정을 '오징어'에 빗대 작품을 완성했다.
"오징어는 바다에 있을 때 아름답고 똑똑한 동물이지만 뭍으로 올라가며 흐느적거리고 냄새나는 생물이다. 특히 미국인들은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고 말린 오징어 싫어한다. 그런 오징어에 저를 동일시했고, 광화문 시위 현장에서 오징어 굽는 냄새를 맡고 뭔가 친숙하지만 내가 다른 이방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승천하는 것은 냄새가 난다' 작품은 말린 오징어 50축(1000마리)을 엮어서 작가 본인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방부 처리를 한 이 작품은 냄새가 심하게 나서 전시장에서는 밀폐된 유리관에 넣어 전시됐다.
오징어만큼 냄새가 나는 황태포를 사용한 작품도 흥미롭다. '날개를 위한 맞춤복' 작품은 레이스(lace)와 황태포를 엮어서 우아한 백조 모양을 만든 것이다.
귀족들만 입을 수 있었던 레이스와 냄새나는 대표적인 서민 음식인 황태포가 뭉쳐서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했다.
"여성의 노동의 구분하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든 것이다. 레이스를 짜는 행동이 고귀하고, 할머니들이 시작에서 황태포를 벗기는 일이 천하다고 할 수 없다. 어차피 붙이면 같은 것이 된다."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의 시작
이번 전시의 주제인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처럼 박물관 시리즈로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2014년부터다. 그때부터 작품의 제작에 변화가 있었다. 기존에는 1년에 1~2개씩 대작을 만들었다면 이때부터는 매일 하나씩 박물관 시리즈를 만들었다.
"당시 찰흙으로 조물조물해서 '내 얼굴의 정색'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오징어같이 생긴 조형물에 작은 분홍색 동물들이 붙어 있다. 그 상상동물에 이름을 붙여보는 것이 어떨까 해서 시작한 것이 박물관 시리즈이다."
이후 일기를 쓰듯 매일 드로잉을 했고 그것을 기초로 조소와 회화 작품이 나왔다고 한다.
▶불교 미술을 만나 새로운 회화 세계를 구축
매우 동양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이 있는 그의 회화는 불교 미술을 정식으로 배운 2014년도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전통 오방색(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을 주로 썼던 작가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불교 미술을 배우지 않았냐'는 얘기를 자주 듣곤 했다. 하지만 작가가 불교 미술을 배운 것은 귀국 후 5년이 지난 2014년이었다.
"서유기에 관심이 있어서 중국 돈황에 갔다가 불교 미술에 매료됐고, 한국에 와서 절들을 돌아다니면서 조선 불화를 접하게 됐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많은 고려 불화를 보고 2010년부터 2014년도까지 불화 전문가에게 불화를 배웠다. 동양화 재료와 불화의 테크닉을 쓰게 되면서부터 그림에 큰 변화가 있었다."
'내 몸을 바꾸기 위한 신체 진열대'라는 뼈, 심장, 폐 등을 그린 8폭짜리 병풍은 금선(金線)을 이용해 채도가 높은 불화 기법의 진수를 보여준다.
"화가로서 여성으로서 딸로서 할 일은 많지만 몸에 하나밖에 없고 표피에 갇혀 있는 것이 답답했다. 저의 표피로 인해서 감옥 같다는 느낌이 들고, 그것으로 제가 정의된다는 것이 싫어서 몸을 바꿔 끼고 싶었다. 매일매일 몸을 바꿔 낄 수 있는 옷장을 그린 것이다."
3폭으로 나눠서 그린 '난자의 난자' 작품에는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난자에 대한 연민을 담았다. "월경을 하게 되면 난자들이 다 하수구에 들어간다. 난자들이 하나하나 생명체가 있었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출발한 그림이다."
▶심해 생물을 닮은 유려한 곡선들
그의 조소나 회화에 등장하는 유려한 곡선의 형태들은 심해 생물의 모양에서 따온 것들이 많다. 그리스 신화에는 사자의 머리와 새의 발을 가진 생물이 있고,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도 이미 있는 형태를 조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심해어는 상상 이상의 형태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과거 플래닛 어스(Planet Earth)라는 BBC 방송에 심해가 나왔었다. 그때 생물들이 서유기나 산해경에 나오는 얼토당토않은 생물보다 더 신기한 생물들이었다. 심해어들은 이미 있는 형태들이 아닌 것이 많다. 그런 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동물과 여인을 합쳐 놓은 듯한 '웅녀'작품은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웅녀를 표현한 작품이다. 신화에서 곰은 100일 동안 마늘과 쑥만 먹고 여자가 되어 환웅과 결혼해서 단군왕검을 낳는다. 단군왕검의 어머니지만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웅녀의 흔적을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 표현했다.
"신화에 곰이 사람이 됐다고는 나오는데, 곰이 사람이 되는 과정은 나오지 않고 단군을 낳고 사라졌다. 그래서 곰에서 사람이 되는 과정을 피의 흐름과 빛의 흐름으로 표현했다." 실제로 작품에서 피로 연상되는 붉은 물이 투명한 호수를 따라 돌고 있다.
'바닥까지비천해진희망인' 작품에는 작가가 2017년 스페인에서 겪었던 황당한 분실 사건을 동기로 제작했다. 작품은 몸에 택배 꾸러미를 덕지덕지 부치고 울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스페인 빌바오에 레지던시를 다녀왔는데 물류회사에서 시스템 오류로 1년 치 작품이 모두 분실됐다. 물류회사에 전화하면 희망적인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 다음날에 전화해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상황이 제가 작업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도 맨날 뭔가를 만들어 내지만 항상 그 자리이다. 결국 작품은 제가 스페인까지 가서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