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송보국(輸送報國)에 헌신해 온 조양호 회장은 2000년 미국 델타항공과 에어프랑스, 아에로멕시코의 항공동맹체 ‘스카이팀’을 출범했다. 1998년 외환 위기때는 보잉사 항공기 27대를 구매하는 대신 낮은 계약금과 유리한 금융 주선을 받으며 협력했다. 2013년부터는 한미재계회의 한국 측 위원장을 맡아 재계 외교관 역할을 해왔다.
아버지 업적을 재확인한 조원태 회장이 항로를 고민하고 있다. 행동주의 사모펀드(PEF) KCGI로부터 경영권을 지키고 남매 간 갈등 우려도 불식시켜야 한다. 승계자로 인정받을 경영 성과도 내야 한다.
지난달 조 회장은 미국 뉴욕에서 열린 특파원 간담회에서 항공운송 주축인 대한항공과 이를 지원하는 항공 제작, 여행, 호텔 사업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구조조정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익 없는 사업은 정리해야 한다는 취지로도 발언했다.
조 회장의 이번 발표는 강성부 KCGI 대표의 공격을 염두에 둔 행보라는 분석이 나온다. KCGI는 지난달 14일 기준 한진칼 지분율 15.98%를 확보했다. 강 대표는 그간 유튜브를 통해 기업 지배구조 개선으로 한진그룹을 운송 전문 종합물류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5월 조 회장의 선임 적법성을 문제삼아 소송도 벌였다.
표정관리중인 조 회장의 속은 편하지 않다. 대한항공 3분기 영업이익은 1179억원으로 전년 동기 3928억원에 한참 못 미친다. 노선별 매출은 같은 기간 미국이 6%, 국내선 7%가 늘어난 반면 일본은 19% 줄어든 점도 부담이다. 7월 시작된 일본과의 무역 냉전 여파가 지속되고 있어 관련 수익 하락이 장기화될 수 있다.
지난 3월 대한항공이 ‘비전 2023’을 내고 2023년까지 차입금 11조원, 부채비율 395%로 낮춘다고 했지만 갈 길이 멀다. 9월 말 기준 대한항공 차입금은 16조5230억원으로 지난해 말 12조6732억원보다 4조원 가까이 늘었다. 부채비율 역시 707%에서 862%로 올랐다. 목표의 2배를 넘는 숫자다.
경영권 안정이 우선이라는 점에서 기회는 있다. 지난달 고 조양호 회장 주식 상속 이후 조원태 회장과 특수관계인 지분율은 28.94%에 달한다. 대한항공에 우호적인 델타항공 지분율 10%를 합치면 40%에 가깝다. 조 회장은 특파원 간담회 당시 우호 지분 확보에 자신감을 보였다.
남매 간 지분이 균등한 점은 조 회장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다. 조 회장의 한진칼 지분율은 6.52%, 둘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6.49%, 셋째 조현민(조 에밀리 리) 전무 6.47%로 비슷하다. 어머니인 이명희 한국공항 고문(5.31%) 영향력도 무시 못할 수준이다. 조 회장은 이 같은 지분 관계가 가족 간 협력이 필요한 구조라는 입장이다. 지분이 나뉜 일은 아버지 의도는 아니었지만 남매가 각자 자기 분야에 충실하기로 합의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경영권 다툼의 불씨는 남았다는 관측은 여전하다. 최종현 SK 회장이 1998년 별세한 뒤 가족 회의에서 최태원 회장에게 힘을 모아주기로 한 사례와 비교되기도 한다.
조 회장 고민의 출구는 경영 성과 개선이다. 그는 정보기술(IT)과 마케팅이 접목된 새 패러다임으로 경쟁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에 대한항공은 5일 카카오와 고객가치 혁신 및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승객이 항공권을 찾는 순간부터 결제, 체크인, 탑승에 이르는 전 과정이 모바일에 최적화 될 전망이다. 카카오 계열사 콘텐츠를 대한항공 기내 주문형 비디오 오디오(AVOD)로 제공하는 협력도 추진한다. 커머스 플랫폼 협업과 함께 양사가 보유한 상품의 판매 확대를 위한 상호 협력 등 구체적 방안도 협의할 예정이다.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경영 안정화도 이어간다. 한진칼은 지난달 8일 이사회를 열고 기업지배구조헌장을 제정했다. 이사회 산하에 거버넌스 위원회와 보상위원회도 신설했다. 경영진 성과를 적절한 보상으로 이끌어 주주 신뢰 확보와 경영권 방어에 나서는 모습이다.
조원태 회장은 지난달 ‘대한항공 50년사’ 발간사에서 선대 회장들의 성과를 열거했다. 노후 항공기 8대짜리 회사를 30년만에 113대 규모로 키운 고 조중훈 창업회장, 변화를 멈추지 않고 국제 무대 입지를 높인 조양호 전 회장의 업적은 다음 세대의 성과를 묻고 있다. 대한항공 100년사에 담길 3세 조원태 회장의 발자취는 무엇일까.
선대 어록을 넘기며 자문하던 조원태 회장의 손은 속도보다 용기를 중시한 할아버지 회고에서 한동안 멈췄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업을 함에 있어서 ‘처음엔 지더라도 나중에 이기면 된다’는 마음가짐 을 가졌다. (중략) 항상 이기기만 바라는 것은 또한 겸손하지 못한 오만과 통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지면서 이기는 것,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 사업’ 이라는 믿음으로 나는 스스로 용기를 북돋웠다.”(대한항공 50년사 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