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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죄형법정주의 어긴 입법편의주의... ‘n번방 방지법’의 문제점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범종 기자
2020-05-20 03:07:00

대통령령 기댄 기술·관리적 조치…기업 '빅브라더' 변질 우려

정부 “공개된 정보만” vs 학계 "사기업이 문제 판단 불가"

국회 과기정통위 "빨리 통과 중요…21대 국회 다시 개정안"

국회의사당. [사진=국회 제공]

대통령령에 기댄 ‘n번방 방지법’이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사적 대화 검열 의도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모호한 법 조항이 정보기술(IT)업체를 ‘빅 브라더’로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지난 4일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의원은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부가통신사업자’가 불법 촬영물 유통을 막기 위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술적·관리적 조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같은 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3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처벌은 명확한데 그 조건인 '대통령령'은 안개 속에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7일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 절차만 남겨놨다.

◆‘시작·끝이 대통령령’ 처벌 기준 불확실

이를 두고 불법 촬영물 유통 방지 의무를 사업자에게만 내맡기고 구체적인 기준도 없이 징역형에 처할 수 있게 해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죄형법정주의는 어떤 행위가 범죄로 처벌되기 위해서는 미리 법률로 규정돼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현재 IT업체들이 활용하는 금칙어와 DNA 필터링(영상 특징을 잡아 차단)을 넘어선 n가지 기술이 동원될 가능성이 생긴다는 우려가 나온다.

시민단체 오픈넷은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해당 법안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들은 △대통령령에 기댄 국회의 편의주의적이고 무책임한 입법 △예측 불가능한 기술발전 적용 가능성 △대법원에서도 판단이 뒤집히는 불법성을 기업이 사전에 판단해야 하는 부담 △기계에 의한 사적 대화 검열 관련 사회적 합의 부재 △위험을 줄이려는 기업의 공론장 폐쇄에 따른 인터넷 본연의 기능 상실 가능성 등에 주목했다.

현행법상 불법 촬영물 신고 시 삭제할 대상은 일반에 공개된 경우에 한정된다. 반면 개정안은 명확한 기준도 없이 부가통신사업자가 불법 촬영물을 기술적·관리적으로 조치하라는 내용이 추가됐다. 이에 인터넷상 표현의 장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대통령령으로 정해질 부가통신사업자 범위도 관심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자본과 인력이 부족한 스타트업, 웹사이트에 댓글창을 운영하는 개인도 부가통신사업자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전기통신사업법상 인터넷을 이용해 부가통신역무를 제공하는 자본금 1억원 이하인 부가통신사업자는 신고가 면제된다. 자본과 인력이 부족한 스타트업도 얼마든지 부가통신사업자가 될 수 있어 위험 부담을 줄이려면 소통 관련 플랫폼사업을 시도조차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기존 사업자들도 하나둘 씩 소통 창구를 폐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때문에 기준이 모호한 법에 부담을 느낀 기업들이 갖가지 기술을 동원해 결국 ‘외주화된 빅 브라더’로 변질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사적대화 검열 없다”는 방통위

방송통신위원회는 15일 설명자료를 내고 해명에 나섰다. 문제가 된 ‘기술적·관리적 조치’ 대상은 일반에 공개돼 유통되는 정보일 뿐 사적인 대화가 아니라는 내용이다. 방통위는 불법 촬영물을 발견한 이용자가 사업자에 신고하는 기능, 촬영물이 서비스 내에 유통되지 않도록 검색과 송수신을 막는 조치와 경고 문구 발송 등을 고려하고 있다. 방통위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과 조치의무사업자가 기술적 조치 등에 활용할 ‘(가칭)표준 DNA DB’ 개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향후 시행령 개정 과정에서 사업자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우려를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방통위는 또한 기술적·관리적 조치 의무를 부담하는 사업자 범위는 ‘전기통신업무의 종류, 사업규모’ 등을 고려해 정하자는 국회 법사위 전문위원 의견에 동의한다는 입장이다. 향후 시행령 마련 과정에서 사업자 의견을 수렴해 조치의무 사업자 범위를 구체화할 계획이다.

하지만 해당 개정안은 정부 발의안이 아닌 국회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입법 편의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여전하다. 오픈넷은 정부 설명대로 일반에 공개된 정보만 다룰 경우 빅 브라더 가능성은 줄어들 것으로 본다. 다만 애초 정부가 실효성을 갖추려 했다면 오히려 인터넷망을 가진 통신3사를 직접 조치해야 전 국민에 대한 불법정보 유출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인터넷 자유를 위해 이같은 방식에도 반대하지만 기술적으로 접근하려면 차라리 이렇게 하는 편이 낫지 않았겠느냐는 물음이다.
 

서울법원종합청사. [사진=이범종 기자]

정부가 해명한 국회 발의안··· “판단은 판·검사가”

국회가 만든 모호한 법 조항에 대해 정부가 취지를 해명하는 상황에서 법원과 검찰은 그 판단 근거를 국회가 남긴 법 조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오픈넷 이사인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해당 조항이 위헌적이라고 본다. 그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X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Y를 해야 한다, 안 하면 징역 3년’이라는 식의 법은 형법 어디를 봐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소는 고발을 접수한 검찰이, 유죄는 법원이 판단한다”며 “이들이 입법 의도를 보겠지만 정부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이럴 경우 국회 의사록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기술적 조치 자체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무엇이 대화 중 불법 사진이나 영상, 표현인지 기업이 미리 판단해 걸러낼 수 있느냐는 문제 때문이다. 특정 신체부위 촬영이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지도 1~2심과 대법원 판단이 다른데 사기업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학계에서 거론된다.

IT업계 관계자는 “어떤 영상물이 (법적으로) 문제 되는지 판단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며 “무엇이 불법인지 판단하는 기술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고 말했다. 사람도 미리 판단 못 하는 불법성 여부를 인공지능(AI)을 도입한들 판단할 수 있겠느냐는 하소연이다.

국회서도 ‘헌법소원’ 가능성 거론

국회 내부에서도 기술적·관리적 조치의 모호성에 따른 죄형법정주의 위반 문제가 제기됐다. 지난 7일 국회 과기정통위 회의록을 보면 미래통합당 박대출 의원은 개정안 속 기술적·관리적 조치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더불어시민당 이종걸 의원도 “처벌과 관련된 내용인데 이런 걸 다 무책임하게 대통령령으로 위임하는 것은 암만해도 느낌이 좀 별로”라며 “이것에 반대되는 사업자 또는 당사자가 위헌 신청을 하는 경우에는 또 여러 논란에 빠질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위원회는 위헌 우려와 죄형법정주의 문제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에 포함된 정보통신서비스 사업자의 기술적·관리적 조치 의무 조항을 삭제하기로 했다. 다만 조항의 근거가 된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 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부가통신사업자’의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술적·관리적 조치’ 조항은 손 대지 않았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변재일 의원은 “우선 법을 빨리 통과시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며 “국회가 무슨 조치를 취하고 있느냐 이런 것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개정안의 허점에 대해서는 “대안을 만들어서 정부 개정안을 내든 아니면 의원입법으로 하든 해 가지고 21대 국회 개원하면 개정안을 다시 한번 내 주시기 바란다”고 의견을 냈다.

정부가 2건 발의하고 국회의원이 11건 발의한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 총 13건은 이날 위원회안으로 통합 가결됐다. 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은 산회를 선포하며 “21대 국회는 더 잘하겠다”며 “말로만 아니고 실천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20대 국회는 이달 29일 임기를 마친다. 마지막 본회의는 20일 오후 2시에 열린다. 여야는 법사위를 통과했거나 시급한 민생법안, n번방 관련 법안 등을 처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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