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박사는 일찍부터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기업경영으로 축적한 부를 사회에 환원한 인물로, 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난 유 박사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이를 뒤로하고 31세가 되던 1926년에 귀국,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 박사는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는 일념으로 1936년 유한양행을 주식회사체제로 전환했고, 193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채택했다. 1962년 국내에서는 두번째로 주식공개를 단행했고, 1969년에 이미 경영권 상속을 포기하고 전문 경영인에게 사장직을 물려줬다.
유한양행은 1969년 이후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사원 출신의 전문경영인을 선출하고 있다. 현재 약 1900여명의 유한양행 임직원들 중 유일한 박사의 친인척은 단 한 명도 없다.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유 박사는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한다’는 원칙 아래 기업이윤을 나라 발전을 위한 인재 양성에 투자했고 장학 및 교육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장남 유일선씨에게는 “대학까지 졸업 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유언과 함께 유일선 씨의 딸이자 자신의 손녀인 유일링(당시 7세) 양의 학자금으로 1만달러만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딸 유재라씨에게는 학생들이 뛰놀 수 있도록 유한중·공업고등학교 일대의 땅 5000평 등을 상속했는데 ‘소유주식을 비롯한 모든 재산들은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쓰도록 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작고 후 오랜 시간이 지나 CIA가 비밀문서를 공개, 유 박사가 생전에 해외에서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