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그룹은 1972년 그룹 모태가 된 현대중공업을 설립한 후 줄곧 선박과 해양플랜트 그리고 엔진 등과 관련한 제조업 중심으로 사업을 펼쳐왔다. 지난해부터 ESG 경영을 강화하기 시작한 현대중공업그룹은 올해 이미지 변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첫 단추는 사명 변경이다.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현대중공업지주가 사명을 ‘HD현대’로 변경하기로 한 것이다. 현대중공업그룹 창립 50주년을 맞아 사명을 변경하고 제조업을 넘어 수소 등 미래 사업 분야의 신성장동력을 적극 추진해 기술 중심 그룹으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ESG경영 비전 선포...여성 사외이사 선임 등 눈길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해 그룹의 미래 성장과 ESG가치 실현의 의지를 담은 비전과 슬로건을 발표했다. 일단 ESG 경영 비전은 현대중공업그룹의 모태인 조선해양 사업의 주 활동 무대인 ‘해양’에서 영감을 얻어 '바다에서 시작하는 깨끗한 미래(Future From the Ocean)’로 정했다. 탄소 중립 실현과 자연생태계 보존 등을 위한 그룹의 지속가능 경영 실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슬로건은 ‘비욘드 블루 포워드 투 그린(Beyond Blue Forward to Green)’으로 선정했다. 조선해양 등 주력 사업에서 혁신을 통해 변화를 꾀하고(‘Beyond Blue’),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 친환경 중심의 미래 사업으로 전환하겠다(‘Forward to Green’)는 의미가 담겼다는 설명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이번 그룹 ESG비전과 슬로건 선포에 따라 ESG 분야별 중점 관리 영역을 설정해 그룹의 공통 ESG경영활동 평가 지표를 마련한다. 이를 통해 전사 ESG 경영 활동을 모니터링하는 전략적 관리 체계를 구축, ESG경영 문화를 정착시킨다는 계획이다. 내·외부 이해관계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ESG 홈페이지 구축, 대학생 대상의 ‘ESG 인턴십 프로그램’ 운영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환경, 동반성장, 컴플라이언스 등 각 분야별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ESG 자문 그룹과 함께 ESG 자문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했던 현대중공업그룹은 올해 ESG 정책에서 또 다른 변화를 꾀한다. 주주총회를 통해 여성 사외이사를 대거 선임하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제조업 중심으로 운영돼왔던 현대중공업그룹에는 이사회가 남성 중심 이사들로 구성됐었다.
일단 현대중공업지주는 이지수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를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으로 선임할 계획이라고 공시했다. 1964년생인 이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대와 미국 하버드대·보스턴대에서 석사를 한 뒤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기획재정부 국세예규 심사위원, 국세청 비상장주식평가 심의위원 등을 두루 거쳤다.
계열사인 한국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도 각각 여성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을 선임할 예정이다. 조영희 엘에이비파트너스 파트너 변호사와 판사 출신인 박현정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3명 모두 법률 전문가로서 현대중공업그룹의 ESG 경영에 대한 감독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현대미포조선과 현대일렉트릭도 여성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을 선임한다는 계획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여성 사외이사들을 대거 선임한 것을 계기로 ESG 경영을 더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오는 8월부터 개정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이 시행되는 데다 그룹 전체가 체질 개선을 필요로 하는 시점인 만큼 지배구조 개선 등 ESG 역량 강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퓨처 빌더' 미래 비전으로...수소 밸류 체인 구축 목표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대표는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기술 전시회 CES 2022에서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 비전으로 ‘퓨처 빌더(Future Builder)’를 제시했다. 세계 1위 쉽 빌더(Shipbuilder)로서의 50년을 넘어 최고의 퓨처 빌더로서 앞으로의 50년은 더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새로운 성장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현대중공업그룹은 미래 조선·해양과 에너지, 기계 등 3대 핵심 사업의 혁신 기술과 해양 수소 밸류 체인의 로드맵을 소개했다. 앞으로 미래 친환경 에너지원인 그린 수소를 해상에서 생산, 저장한 후 육상으로 운반해 차량용 연료 등으로 판매하거나 전기로 전환할 수 있는 사업 구조와 기술력을 갖춘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지난해 발표한 '수소 드림 2030' 로드맵도 이 같은 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이 로드맵의 핵심은 그룹 내 각 계열사의 인프라 및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오는 2030년까지 육상과 해상에서 수소의 생산부터 운송, 저장, 활용에 이르는 수소 밸류 체인을 구축하는 데 있다.
먼저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수소 운송과 함께 생산∙공급을 맡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2025년 100MW(메가와트) 규모의 그린 수소 생산 플랜트를 구축하고 2만 입방미터급(㎥)급 수소운반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할 계획이다. 수소연료전지와 수소연료공급시스템 기술을 적용한 수소 연료전지 추진선도 개발 예정이다. 수소 연료전지 추진선은 기존 내연기관보다 에너지 효율을 40% 이상 높일 수 있고 황산화물이나 질소산화물 등 대기오염 물질도 전혀 배출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본격적인 수소 선박 상용화 이전 중간단계로써 환경친화적인 연료인 메탄올과 암모니아를 사용하는 추진선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메탄올은 상온 및 상압에서도 액체 상태를 유지해 효율적인 저장과 수송이 가능하고 물에 잘 용해되기 때문에 해양 유출 시에도 자연분해되어 해양오염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암모니아는 연소 후 질소와 물만 남아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고, 상온에서도 액화 상태를 유지하며 잘 증발하지 않아 제조∙저장∙수송에 강점이 있는 차세대 연료다.
선박용 에너지 저장 장치(ESS) 개발을 통해 해상에서의 화재∙폭발 위험 제거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1월 한국조선해양은 세계 최초로 바나듐 이온 배터리(VIB)를 개발한 스탠다드에너지사와 ‘바나듐 이온 배터리 기반의 차세대 선박용 ESS 솔루션 개발’에 대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바나듐 이온 배터리는 물이 주성분인 전해액을 사용해 화재 및 폭발 위험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물론 외부 충격 등으로 인한 열 발생도 거의 없다. 현재 전기 및 하이브리드 추진선 등에 적용되는 리튬 이온 배터리보다 출력이 2배 가까이 높고 수명도 4배 이상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반복적인 충전과 방전에도 배터리 성능 저하가 거의 없어 높은 안정성과 뛰어난 내구성을 자랑한다.
이밖에 현대오일뱅크는 블루수소 생산에 본격 돌입하기로 했다. 블루 수소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만 이산화탄소 포집 및 저장(CCUS) 기술을 통해 대기 중에 퍼지지 않는 방식으로 만든 수소를 말한다. 현대오일뱅크는 생산된 블루 수소를 탈황 설비에 활용하거나 차량, 발전용 연료로 판매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오는 2030년까지 전국에 180여개의 수소 충전소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현대일렉트릭과 현대건설기계 역시 수소 연료 전지를 활용한 발전 사업과 건설 기계 장비 사업을 추진한다. 현대일렉트릭은 친환경·무소음 수소 연료 전지 발전 설비를 구축한다. 현대건설기계는 업계 최초로 수소 기반의 중대형 건설장비 개발에 나설 계획이다. 수소 연료 전지 건설 장비의 테스트 모델을 개발하고 있는 현대건설기계는 오는 2023년 상용화를 목표로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친환경 선박 관련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해양 생태계 보전과 지구 환경 보호에도 앞장서고 있다. 페트병을 활용한 '그린 리사이클' 유니폼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2월 현대리바트와 효성티앤씨가 '친환경 자원재 순환 근무복 도입에 대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이후 현대중공업그룹은 연간 필요한 유니폼 약 20만장을 친환경 섬유로 생산하고, 올해 6월부터 사업장에 단계적으로 도입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