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 A씨 이야기. 그는 성실한 가장이다. 30대 초반인데 벌써 세 아이 아빠라 “애국자” 소리를 자주 듣는다. 애들이 뛰어 놓아도 아랫집에서 불평하는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지난 2018년 봄부터 경기도 성남의 한 빌라 테라스층에 전세로 살았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용실로 출근해 쉴 새 없이 단손 손님 머리 손질을 하다 저녁 9시경 퇴근한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취업에 관해 확고한 생각을 갖고 고교 졸업 후 대학 졸업장 대신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 만큼 실력도 인정받았다. 직원으로 근무하다 단골손님이 많아지자 자신의 샵을 오픈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고군분투했다. 몇 년에 걸친 펜데믹에도 미용실을 지켜냈다. 위례신도시 아파트에 당첨되며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2023년 4월 입주가 확정돼 작년 여름이 지나자마자 인근 부동산에 연락해 새로운 세입자 찾기에 나섰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부동산 침체 속에서 서울·수도권에 집중적으로 속칭 ‘빌라왕 사건’이 연속 발생하자 빌라의 모든 수요가 꽁꽁 얼어붙은 것이다. 집을 보러 온 사람은 10개월간 한 커플에 불과했다.
그와 가족은 빌라에 사는 동안 집주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5년을 살면서 2억6000만원이던 전세금을 중간에 단 한 번 500만원 올린 게 전부였고, 아이 셋을 키우는 그의 집안 사정을 여러 가지 이해해주었기 때문이다.
올 봄 큰아이가 분당 초등학교 입학했다가 위례로 전학해야 하는 점이 마음에 걸린 그는 은행 대출과 친구 돈을 빌려 아파트 잔금을 치른 뒤 위례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이후에도 본인 돈으로 5년간 살던 빌라 대청소를 하고 집주인과 함께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도 집주인이 자신에게 전세금을 돌려주기 위해 백방으로 대출을 알아봤으나 여러 이유로 불발된 점을 알기에 그간 좋은 관계였던 집주인에게 화를 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은행으로부터 최대 양해를 받은 날짜가 오는 6월 11일, 이날까지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거나 집주인이 전세금을 일시 상환 못하면 다음 절차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로 집이 넘어가 경매 절차에 들어간다. 하지만 모두가 빌라를 기피하는 와중에 자신이 살던 빌라가 얼마에 낙찰될지 몰라 그는 밤잠이 안 온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큰 욕심 없이 살아온 그의 삶이 전세집 경매 시간이 다가오며 집주인에게는 인간적으로 미안한 마음, 다른 한편으로는 전세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영혼이 좀 먹는 기분이다···.
A씨의 불안은 근거가 없지 않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전국 빌라 전세가격지수는 지난해 7월 0.05% 상승을 마지막으로 올해 3월(―0.34%)까지 8개월 연속 하락했다. 특히 서울·수도권의 추락이 두드러진다. 동아일보가 지난 4일 보도한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 분석 결과 수도권에서 역전세 우려가 높은 빌라는 올해 계약 만기를 앞둔 빌라 9만4951채 중 6만530채, 비율로 보면 무려 63.7%로 나타났다. 반면 5개 광역시와 지방의 역전세 우려 빌라 비중은 각각 51.6%, 55.9%였다.
이들 빌라의 현재 보증금만 13조원이 넘고 이 중 2조4000억원을 집주인이 추가로 부담해 기존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등록된 2년 전(2021년 5∼12월) 빌라(연립·다세대) 전월세 17만815채를 전수 분석한 결과 전세 10만6728채(공시가격 없는 주택 제외)의 62.6%인 6만6797채는 기존 전세금으로 전세보험 신규 가입이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세보험 가입이 안 되는 빌라는 전세금을 떼일 경우 보증기관에서도 이를 받을 수 없어 전월세 계약이 사실상 힘들다. 집주인들이 현금 여력이 없어 이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전세금을 떼이는 세입자가 늘 수 있다. 빌라왕들의 직접적 피해자가 수 천명인 반면 빌라왕이 촉발한 파동에 의한 2차 피해자는 수 만명에 달하는 셈이다.
정부는 지금 같은 상황에 억울할 수 있다. 지금 만기가 돌아오는 전세 계약이 대부분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전 이뤄진 계약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세 사기 피해자들을 위해 정부가 지난 1월 내놓은 1%대 저리 대출 상품이 출시 이후 총 69건 신청됐으나 이중 대출 실행이 된 것은 13건에 불과했다. 5건 중 4건이 거부 당한 셈이다. 또 배정 예산의 0.8%만이 집행됐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정부 대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작금의 부동산 문제 근본 원인이 전임 대통령 당시 잘못된 부동산 정책 남발에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바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정부는 영속성을 갖는다. 그 때의 국민이나 지금의 국민이 다르지 않다. 지난 정부 때 뿌려진 부동산시장을 옥죄는 갖가지 반(反)시장적 매듭은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잘라내야 한다. 정부가 이도 저도 못하는 사이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