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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장은주의 여車저車] 모빌리티 선구자 꿈꾼 기아, 자전거에서 전기차까지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장은주 기자
2023-06-10 06:00:00

'3000리호' 자전거에서 시작해 미래차로

존폐 위기 속 현대차그룹 인수로 부활

'자동차' 떼고 종합 모빌리티 기업 도약

기아의 플래그십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EV9'[사진=기아]

[이코노믹데일리] 기아는 지난해 글로벌 시장에서 290만3619대를 판매했다. 이는 전년(2021년 277만7056대)보다 4.6% 증가한 것으로 연간 판매량 300만대 시대를 눈앞에 뒀다. 기아는 '아시아에서 일어나 세계로 진출한다'는 뜻을 담은 사명처럼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모빌리티 산업 선도한 故 김철호 기아 선대회장

기아 창립자인 고(故) 김철호 회장은 1923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각종 기계 기술을 배우고 1941년 일본의 삼화정공을 인수해 자전거 제조와 판매를 시작했다.

김 회장은 1944년 한국으로 돌아와 경성정공을 설립했다. 경성정공은 1952년 '기아산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첫 국산 자전거 '3000리호'를 출시했다. 단 12대로 시작된 3000리호는 대중교통 수단이자 소화물 운송수단으로 국내 모빌리티 산업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3000리호는 훗날 대중에게 익숙한 삼천리자전거로 계승된다.

기아산업은 3000리호가 성공하며 자본을 쌓았고 1961년에는 일본 기업 혼다와 제휴해 기아혼다를 설립, 오토바이 제조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인 1962년에는 마쓰다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 생산한 삼륜차 K-360을 선보였고 1967년에는 T-2000, 1969년에는 K-600 등 다양한 모델을 내놨다. 특히 중형 삼륜차인 T-2000은 1만대 이상을 판매해 사세 확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승용차 생산 금지'…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에 '휘청'

기아산업은 자동차 수요가 늘어나자 1970년 11월 경기 시흥군(현 광명시)에 국내 첫 종합 자동차 공장인 소하리 공장 착공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듬해 7월 소하리 일대가 갑작스럽게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지정돼 공장 증·개축이 불가능해졌다.

국내 최초 후륜구동 승용차 '브리사'는 소하리 공장에서 생산한 첫 모델이다. 1974년 출시된 브리사는 마쓰다자동차 파밀리아의 차체를 바탕으로 독자 개발한 PC 엔진과 레나 엔진 등을 탑재해 국산화 비율을 높였다.

브리사는 성인 5명이 탑승할 만큼 넓은 실내로 1975년에만 1만202대가 생산돼 국내 승용차 시장 판매량의 58.4%를 차지했다. 브리사는 현대자동차 포니와 함께 택시로도 인기를 끌었지만 1981년 전두환 정부의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에 따라 단종 운명을 맞는다.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는 자동차 제조사마다 생산 가능한 차종을 정부가 정해주는 정책이다.

기아가 생산할 수 있는 차량은 상용차로 한정됐다. 승용차 생산이 막히자 경영이 어려워졌고 1980~1981년 500억원 적자를 냈다. 이에 김상문 당시 기아산업 회장은 1981년 자신이 보유한 기아산업 주식 25%를 직원 복리후생을 위한 종업원 지주조합에 출연하면서 재도약을 다짐했다.

기아산업을 부활시킨 것은 '봉고 신화'였다. 기아는 1980년 9월 소형 화물차 '봉고 1톤 트럭'을 시작으로 1981년 8월 '봉고 코치'에 이르기까지 화물과 승합을 아우르는 제품군을 확보했다. 봉고 코치는 출시 첫해 1011대가 판매됐지만 △1982년 1만1003대 △1983년 1만3083대 등으로 판매량은 꾸준히 상승했다. 1987년 기준 누적 5만3353대가 판매·수출됐다.

기아산업 직원들도 자진해 상여금을 반납하고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에 몰입한 결과 1983년 국내 50대 기업 중 가장 높은 수익성을 기록한 회사 중 하나가 됐다.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가 해제된 1987년 기아산업은 이전부터 묵혀 놓은 소형 승용차 프라이드를 세상에 내놨다. 이어 고급 세단인 콩코드도 출시하며 1988년에는 자동차 생산 100만대를 달성하게 됐다.

◆실적 악화와 존폐 위기를 딛고 다시 일어선 기아

1990년 3월 기아산업은 기아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했다. 그리고 1993년 도심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스포티지를 출시하고 해외시장 진출에 성공한다. 이 기세를 몰아 1995년에는 자동차 수출 100만대를 기록하고 1996년엔 자동차 생산량 500만대를 달성했다.

승승장구하던 기아차는 1997년 말 외환위기와 함께 경영 실적과 재무구조가 악화됐다. 결국은 1998년 부도를 맞았고 현대그룹에 인수됐다가 이후 계열 분리로 현대자동차그룹에 편입됐다.

기아차는 2005년 정의선 대표이사(현 현대차그룹 회장) 취임으로 변화 계기를 맞았다. 정의선 사장은 회사 정체성으로 '디자인'을 부여하고 공격적인 브랜드 마케팅을 전개했다.

디자인 혁신은 2006년 피터 슈라이어 디자인 총괄 부사장이 들어오며 본격화했다. 그가 디자인을 총괄한 1세대 K5는 2010년 국내외에서 디자인상을 휩쓸었다. K5는 그해 현대차 쏘나타를 제치고 국내 중형 세단 판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기아차는 2021년 사명에서 '자동차'를 떼고 '기아'로 변경했다. 자동차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이동 솔루션을 제시하는 종합 모빌리티 회사로 거듭난다는 목표를 담았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간다는 김철호 창업주의 꿈은 현대차그룹으로 주인이 바뀐 지 20여년이 지난 현재 자율주행 전기차와 도심항공 모빌리티(UAM)로 실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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