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윤석열 대통령이 6박 8일 간 순방한 폴란드·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 등 동유럽은 한국 기업의 새로운 경제 영토로 급부상한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국가 미래 첨단 전략산업 중 하나인 이차전지(배터리)는 동유럽을 생산 거점으로 삼아 유럽 시장을 공략할 채비에 분주하다.
국내 배터리 업계는 글로벌 시장 지배력을 높이는 전략으로 다극화를 택했다. 유럽과 북미, 아시아에 각각 공급망을 만들고 이들을 아우르는 폭넓은 전선을 구축하면서 대응하는 모양새다. 유럽에 폴란드가 있다면 북미에는 미시간주(州)에서 켄터키-테네시-조지아-텍사스주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벨트가 만들어졌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마더팩토리(Mother Factory·개발과 제조 중심이 되는 공장)로 중국과 말레이시아·베트남·인도네시아에 국내 배터리 관련 기업이 포진했다. 중국과 말레이시아에서는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가 대규모 수요처로 떠오르기 훨씬 이전인 2000년대 초중반부터 중국과 말레이시아에서는 정보기술(IT) 기기에 들어가는 소형 배터리가 생산됐다.
◆폴란드서 환영받는 K-배터리, 국가 경제 '큰 손' 등극
한국 배터리 산업의 한 축인 유럽에서 폴란드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서유럽 관문인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북쪽으로 발트해를 건너면 이른바 '발트 3국'으로 불리는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와 곧바로 이어지며 지리적 우위를 가졌다. 또한 1991년 구소련 해체 이후 시장경제가 빠르게 자리를 잡으며 노동력·토지 공급이 활발히 이뤄졌다.
폴란드 진출에 가장 열성적인 배터리 기업은 LG에너지솔루션이다. 이 회사는 2016년부터 폴란드 브로츠와프에 유럽 최대 규모인 30만평(약 99만2000㎡) 부지에 배터리 생산공장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폴란드 공장은 지난해 말 기준 70기가와트시(GWh) 생산능력을 확보했다. 올해 말에는 전기차 120만~140만대에 탑재할 수 있는 양인 90GWh로 확장될 예정이다.
LG에너지솔루션이 터를 잡으면서 폴란드는 유럽 전기차 배터리 1위 생산국으로 발돋움했다. 올해 7월 현재 브로츠와프 공장에 근무하는 인원은 현지 주재원을 포함해 6300명에 이른다. 브로츠와프 인구(63만명)의 1%가 LG에너지솔루션에 근무하는 셈으로 직원 가족과 협력사까지 포함하면 지역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브로츠와프 생산법인은 지난해 매출 10조7600억원, 올해 1분기(1~3월)에만 3조9000억원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는 폴란드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 2위 기업 디노폴스카(약 6조원)보다 높은 수준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1월 폴란드 코즈민스키 대학과 현지 경제신문 제츠포스폴리타가 선정한 '폴란드 경제 10대 기여 기업'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차전지 생태계 전·후방을 담당하는 다른 기업도 폴란드에 주목했다. SK이노베이션 계열 배터리 분리막 회사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도 2021년부터 폴란드 실롱스크에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현재 건설 중인 3·4공장이 완공돼 양산을 시작하면 SKIET는 분리막 면적을 기준으로 유럽 최대 규모인 15억4000만㎡를 생산하는 능력을 갖춘다. 포스코홀딩스는 지난해 8월 프젝돌니시(市)에 폐배터리 재활용 공장을 준공했다.
◆인도네시아, 'K-배터리 벨트' 아시아 지역 허브로 주목
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가 한국 배터리 군단의 신흥 허브로 급성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는 배터리 핵심 원료인 니켈과 코발트 등이 풍부해 소재 기업이 잇따라 진출을 선언했고 전기차 공장과 연계한 셀·모듈 등 완제품 생산시설까지 들어서며 거대한 생태계가 조성되고 있다. 인구 2억8000만명을 보유한 인구 대국인 점도 매력 요소다.
인도네시아에 둥지를 틀겠다고 나선 기업은 수 곳에 이른다. LG에너지솔루션과 현대자동차·현대모비스가 연합을 구축했고 포스코홀딩스와 포스코퓨처엠, LG화학, LX인터내셔널 등이 진출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한국 배터리 업계가 조성하는 '글로벌 K-배터리 벨트'의 아시아 지역 허브를 담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이 합작해 인도네시아 카라왕 지역에서 건설 중인 배터리 공장은 내년 상반기 양산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이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이미 건물이 외형을 갖추고 내부로 장비를 들이는 단계에 이르렀다.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공장(HLI그린파워)의 연간 생산능력은 10GWh로 이는 고성능 전기차 10만대에 넣을 수 있는 양이다. HLI그린파워에서 만든 배터리 셀은 현대모비스가 최근 착공한 배터리 모듈 공장으로 옮겨져 완제품으로 만들어진 뒤 현대차 전기차 전용 공장으로 최종 공급된다.
배터리용 광물을 채굴·제련하는 대형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LG화학, 포스코홀딩스, LX인터내셔널, 중국 화유코발트는 지난해 광물을 채굴·가공하기 위한 컨소시엄을 꾸렸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발효를 계기로 지분과 참여사 등을 둘러싸고 논의가 지지부진했지만 업계에서는 올해 안에 세부적인 계약이 마무리될 것으로 본다.
국내 배터리 관련 기업이 추진하는 사업이 모두 본 궤도에 오르면 인도네시아에서 배터리 원료-소재-셀-모듈-전기차까지 모든 밸류체인(가치사슬)을 갖추게 된다.
유럽·북미·아시아를 3대 축으로 한 국내 배터리 업계의 다극화 전략은 거대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물량 공세를 펼치는 중국 배터리 업체와 경쟁할 방책이기도 하다. 중국 CATL과 BYD을 합친 올해 1~5월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49.4%나 된다. 그러나 안방인 중국을 제외하면 한국 3사가 52.6%로 뛰어오른다. 미국과 유럽, 중국과 나머지 아시아 등으로 '블록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내수 편중은 독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