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국내 승강기 시장 점유율 1위 현대엘리베이터가 스위스에 본사를 둔 쉰들러홀딩AG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두고 쉰들러 측이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을 노린 행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현대그룹으로서는 사실상 마지막 남은 보루인 현대엘리베이터를 놓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사태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드는 모습이다.
◆쉰들러,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 노린 주식 매각
24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쉰들러홀딩AG는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찔끔 매도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쉰들러가 이달 들어서만 팔아치운 주식은 4만7392주다. 금액으로는 19억여원이다. 현대엘리베이터 발행주식 총수가 3909만여주인 점에 비춰보면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매각을 지속하며 감소한 쉰들러 측 지분율도 0.1%포인트(P)로 적다.
앞서 쉰들러의 주식 매각으로 현대엘리베이터 주가가 흔들리기도 했다. 쉰들러는 지난달 19~23일(대금 결제일 기준 21~27일)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9만119주를 약 39억원에 판 뒤 같은 달 26일 이를 공시했다. 다음날인 6월 27일 현대엘리베이터 주가는 종가(4만950원) 기준으로 5% 가까운 낙폭을 보였다. 이후 현대엘리베이터는 300억원 규모 자사주를 취득해 주가 방어에 나섰고 최근까지 이 회사 주식은 4만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가 올해 11월까지 매입하겠다고 밝힌 주식은 총액 기준 1000억원에 이른다. 한 차례 자사주 500억원어치 소각이 이뤄지기도 했다. 자사주 매입·소각은 기업이 주가 하락을 막고 주주 이익을 지키는 수단으로 쓰인다. 시장에 풀린 물량을 거둬들임으로써 주식 한 주당 가치를 높이는 식이다.
최근 움직임을 요약하면 쉰들러는 '팔겠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사겠다' 내지는 '사서 없애겠다'는 형국이다. 쉰들러는 "투자 자금 회수 목적"이라고 했으나 매도 규모가 수십억원에 불과한 탓에 이러한 설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적다. 지분 던지기를 지속하며 주가에 충격을 주고 끝내 경영권을 가져가겠다는 의도라는 시선이 많다. 쉰들러 측은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10% 이상 유지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업계에서 제기하는 시나리오는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 확보를 통해 국내 승강기 시장 장악을 노린다는 것이다. 한국은 좁은 국토 면적 대비 도시화 수준과 인구 밀도가 높아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 수요가 많다. 한국승강기안전공단에 따르면 국내에 설치된 승강기 대수는 지난해 80만대를 넘었다. 이는 설치 대수로 세계 7위다. 오는 2028년이면 100만대 돌파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승강기 신규 설치와 교체를 합쳐 국내 시장 점유율 40%를 기록 중이다. 쉰들러의 점유율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쉰들러로서는 현대엘리베이터를 가져가면 단숨에 국내 1위 회사로 올라서는 것은 물론 세계 승강기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
◆질긴 악연의 끝은 어디로…장기전으로 이어질 가능성
현대엘리베이터와 쉰들러의 악연은 20년째 이어지고 있다. 2003년 한국에 진출한 쉰들러는 2006년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5.54%를 인수하며 2대 주주가 됐다. 당시 쉰들러가 밝힌 지분 취득 목적은 경영 참여다. 이와 함께 우호적인 주주로서 장기 투자하겠다는 입장도 내비쳤다. 현대엘리베이터 경영에 관여하면서 회사 가치를 높이고 투자 이익을 실현하겠다는 의도처럼 보였다.
그런데 쉰들러 측의 행보는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 한다. 경영 참여 의사를 밝히고도 주주총회 때 사내·외이사 선임을 추천하거나 오너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경영권을 견제하는 장치를 마련하라고 요구하는 등 주주제안을 내지 않았다. 또한 투자 이익 실현이라는 설명도 주식 매도 금액이 적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쉰들러의 진짜 속내가 무엇인지는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여러 차례 반복된 지분 매각과 함께 쉰들러가 꺼내든 카드에는 손해배상 소송도 들어 있었다. 현정은 회장과 현대그룹이 과거 현대상선(현재 HMM)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현대엘리베이터로 하여금 파생금융상품 계약을 맺게 했고 그 결과 7000억원에 가까운 손해를 회사에 끼쳤다는 이유였다. 해당 계약에는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상선 의결권을 우호적으로 행사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현대상선은 해운업 불황으로 적자를 지속하다 2016년 현대그룹에서 산업은행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쉰들러가 2014년 현정은 회장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쉰들러 측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올해 3월 현 회장에게 "현대엘리베이터에 170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현 회장은 지연 이자를 더해 총 23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금액을 현대엘리베이터에 지급했다.
현재로서는 쉰들러의 현대엘리베이터 흔들기가 장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분 매각과 손해배상 소송 모두 현 회장을 겨눈 모양새다. 주가에 영향을 주고 거액의 배상금을 내게 함으로써 현 회장에 자금 압박을 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일종의 고사(枯死) 작전을 통해 현대엘리베이터를 손에 넣겠다는 것이다.
◆'영끌'로 맞대응한 현정은 회장, 버틸 여력 '한계'
현정은 회장은 쉰들러로부터 현대엘리베이터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무벡스 주식 2475만주 전부(약 860억원)를 써서 배상금을 갚았다. 모자란 돈은 현대네트워크가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433만주와 본인이 가진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319만주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해결했다. 현대네크워크는 현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가 지분 100%를 보유한 회사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그룹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현 회장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음)'을 감행하며 현대엘리베이터를 사수하려는 이유다.
현대그룹은 자동차와 중공업이 떨어져나간 이후 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아산, 현대엘리베이터 등 계열사로 대규모 기업집단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현대자동차그룹에, 현대상선은 산업은행에 각각 넘어가고 현대아산은 남북 경제협력 사업 중단으로 만성적인 자본 잠식에 빠졌다.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2조1293억원을 낸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그룹이 대기업집단에 복귀할 유일한 희망이다.
올해 들어 계열사 실적이 전반적으로 호전될 것으로 전망되지만 쉰들러의 공세가 이어지면 현 회장의 자금력으로는 더는 버티기 어려울 수 있다. 현대네트워크가 지난 4월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담보로 M캐피탈 받은 대출의 금리는 연 12%나 된다. 현 회장은 본인이 보유한 지분 약 320만주를 담보로 연대보증을 섰다. 막대한 이자비용도 문제거니와 현대엘리베이터 주가가 떨어졌을 때 이 주식의 담보 능력이 축소될 수 있다.
현대엘리베이터가 자사주를 취득하고 일부를 소각하며 주가를 떠받친 이면에는 이 회사와 현 회장, 현대네트워크가 맞물린 '빚의 고리'가 자리 잡은 셈이다. M캐피탈과 맺은 주식담보계약 기간은 8월 11일까지다. 자산총액 2000억원, 연 매출 14억원으로 알려진 현대네트워크가 대출금을 갚기에는 한계가 있다.
기사회생으로 토종 사모펀트(PEF) 운용사인 H&Q코리아가 현 회장 측에 3000억원에 이르는 거액을 투자하기로 하면서 M캐피탈로부터 빌린 대출금 상환은 가능해졌다. 급한 불은 껐다는 평가지만 위험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H&Q코리아는 현대네트워크가 발생하는 전환사채(CB)와 교환사채(EB)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자금을 대기로 했는데 EB의 교환 대상이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이다.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 주가를 또 다시 흔든다면 H&Q코리아와의 계약에도 파장이 미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