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은 지난해 말 각 계열사별로 글로벌 전략회의를 마쳤다. 한 해 성과를 점검하고 사업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로 투자에 관한 내용도 심도 있게 다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와 가전 등 사업 실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투자 규모를 늘리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지난 1년 동안 반도체·디스플레이 시설 투자에만 역대 최고인 53조7000억원을 썼다.
◆꺼냈다 하면 수백조원…삼성의 '통 큰 투자'
삼성은 한·미 정상회담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 발표 등 굵직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투자 보따리를 풀었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경기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뒤인 2022년 5월 450조원짜리 패키지를 내놨다. 지난해 3월 정부가 용인시에 세계 최대 크기 반도체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정책을 발표할 당시 총 투자액 510조원 중 300조원이 삼성 몫이었다. 충청·경상·전라 등 비수도권에선 반도체 패키징, 디스플레이·이차전지 부문에 10년간 60조원을 쓰겠다고도 했다.
가장 많은 재원이 들어가는 분야는 단연 반도체다. 지난해 1~3분기 신·증설과 보완 등에 쓰인 돈은 33조4000억원이다. 이 기간 반도체 사업을 하는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은 12조7000억원에 이르는 영업 손실을 냈다. 삼성전자는 해외 법인에서 발생한 배당금과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제조사 ASML 지분 매각으로 현금을 조달했다.
삼성의 반도체 전략은 해마다 조금씩 규모를 키워 발표됐다. 이재용 회장은 부회장 시절인 2019년 4월, 133조원을 투자해 2030년 시스템 반도체 세계 1위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른바 '반도체 비전 2030'은 메모리에 이어 팹리스(설계 전문)와 파운드리(생산 전문)까지 3대 영역을 석권한다는 포부다. 이후 신규 추진, 보완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당장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만 해도 200조원이 들어가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P1부터 P6까지 총 6개 공장이 들어설 예정으로 현재 P4 공사가 진행 중이다. 미국에서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올해 하반기 1차 완공을 목표로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여기에 2026년 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착공에 들어간다.
이차전지와 바이오 사업도 투자가 활발하다. 삼성SDI는 울산사업장에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와 양극재 공장 신·증설을 앞뒀고 미국에서는 스텔란티스·제너럴모터스(GM) 등과 추진한 합작 공장 설립이 진행 중이다. 삼성의 차세대 캐시카우(현금 창출원)로 부상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2032년까지 7조5000억원을 투자해 인천 송도를 세계 최대 의약품 위탁 개발·생산(CDMO) 기지로 구축한다.
◆이재용이 절감한 위기가 '투자 속도전' 원천
투자 속도전의 배경은 '긴박함'이다. 반도체의 경우 클린룸과 장비 등 시설·인프라에 조금만 투자를 소홀히 해도 주도권을 내주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항상 최신 장비와 초미세 공정을 완비해야 한다. 또한 다양한 파운드리 고객사를 유치하려면 폭넓은 공정에 대응 가능해야 한다. 반도체 강국인 미국과 대만이 자국 기업인 인텔·TSMC에 전폭적인 지원을 한 점도 동인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몇 년간 안팎에서 위기 징후가 계속해서 포착됐다. 그 누구보다 이재용 회장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 회장은 수시로 생존, 변화, 기술, 투자를 언급하며 위기감을 드러냈다. 틈 날 때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미래를 위한 투자를 멈춰서는 안 된다"(2020년 5월)거나 "가혹한 위기 상황"(2020년 6월), "시장의 냉혹한 현실"(2021년 11월)을 말한 게 대표적이다.
최근 분위기는 이 회장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선 SK하이닉스가 삼성보다 앞서 미국 엔비디아에 4·5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공급하기로 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폴더블 대중화에 힘썼지만 화웨이와 아너 같은 중국 업체가 맹추격 중이다. 중국 가전 업체 TCL과 하이센스는 저가 제품 이미지를 벗고 인공지능(AI) 등 첨단 가전으로 삼성을 압박하고 있다.
올해에는 반도체 업황 개선이 기대된 반면 그 외 업종은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침체가 예상돼 삼성의 고민을 더하고 있다. 잇따른 조직 개편은 투자 확대와 궤를 같이 한다. 삼성전자는 미래사업기획단과 함께 DX(디바이스경험)부문 산하 비즈니스개발그룹을, 삼성SDI는 전고체 배터리 사업화 추진팀을 각각 신설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이보다 앞서 차세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전담 조직을 새로 만들었다. 재계 관계자는 "조직이 신설·폐지되면 기업의 자금도 그에 맞게 재배분된다"며 "올해 (삼성이) 신규 투자를 발표할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