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데서 그치지 않고 문학작품 속의 장소를 찾아 감성을 채우는 것도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마침 한국관광공사(사장 안영배)는 가을을 맞아 한국문학의 정취가 묻어나는 감성 여행지 5곳을 가볼만한 곳으로 선정했다.
권정생 동화나라는 선생이 머무르며 집필 활동을 한 일직면의 한 폐교를 문학관으로 꾸몄다.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유품과 작품, 가난 속에서도 따뜻한 글을 써 내려간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선생은 2007년 세상을 떠났지만, 작품은 남아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 작은 희망과 위안이 된다. 이곳에서 ‘좋은 동화 한 편은 백 번 설교보다 낫다’는 선생의 신념을 찬찬히 되새길 수 있다.
권정생 동화나라가 자리한 망호리는 첫인상부터 친근하다. 《몽실 언니》의 배경이 된 마을이다. 권정생동화나라 초입에 넓은 운동장과 놀이터가 있다. 강아지 똥, 몽실 언니, 엄마 까투리 등의 조형물도 건물 곳곳에서 만난다. 건물 벽면을 채운 커다란 강아지 똥 모형과 선생의 추억이 깃든 교회 종모형이 눈길을 끈다.
1층 전시실에는 권정생 선생이 남긴 작품과 유품이 있다. 단편 동화 《강아지 똥》 초판본, 선생이 쓴 일기장과 유언장, 가난을 견뎌내며 살아온 발자취가 시기별로 전시된다. 선생의 일대기와 메시지를 담은 영상이 뭉클한 감동을 준다.
1937년 일본 도쿄에서 5남 2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선생은 청소부로 일한 아버지가 쓰레기 더미에서 가져온 헌책을 읽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해방 이듬해 귀국해서 한국전쟁을 겪었고, 나무 장사와 고구마 장사 등을 하며 어려운 생활을 꾸려갔다. 청년 시절 결핵을 앓았고, 한쪽 콩팥과 방광을 들어내기도 한 선생에게 가난, 병마와 함께한 세월은 글을 쓰는 자양분이었다.
조탑마을 일직교회의 종지기로 문간방에 머무른 선생은 죽기 전에 아이들을 위해 좋은 책 한 권 남기려 했다. 《강아지 똥》은 그렇게 탄생한 작품으로, 1969년 기독교아동문학상에 당선됐다.
전시실 곳곳에는 선생의 책이 설명과 함께 전시된다. 전쟁의 참상 속에 아이들의 삶과 인간미를 그린 《몽실 언니》, 산불 속 까투리의 모성애를 담은 《엄마 까투리》 외에 《무명 저고리와 엄마》 《황소 아저씨》 등 유작 수십 편을 만날 수 있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게 전부지만, 선생은 불쌍한 어린이에게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전시실에 보관된 유언장에는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는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적혀 있다.
전시실 한쪽에는 권정생 선생이 살던 오두막집을 실물 그대로 재현했다. 하루 글을 쓰면 이틀 누워 쉬어야 했지만, 선생은 사람 하나 간신히 누울 수 있는 단칸방에서 낮은 책상에 의지해 《점득이네》 《랑랑별 때때롱》 등 마지막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비료 포대로 만든 부채, 몽당연필 등 검소한 삶을 보여주는 흔적이 애잔하다.
1층 복도에는 선생이 살아온 길을 담은 사진이 전시된다. 사진 속의 선생은 늘 편안하고 따뜻하게 웃는 얼굴이다. 권정생동화나라에는 도서실과 서점이 마련되어 선생의 작품을 읽어볼 수 있다.
복도 한쪽에 단편 동화 《해룡이》를 그림으로 풀어낸 김세현 화가의 작품 50여 점도 전시 중이다.
권정생 동화나라는 우표와 엽서를 판매해 느린우체통으로 편지를 보내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동화나라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은 북녘 어린이 돕기에 쓰인다.
건물 2층에 단체 관람객을 위한 숙박 시설과 강당이 있으며, 놀이터 옆에 숲속도서관도 문을 열었다. 권정생동화나라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5시이며, 입장료는 없다. 단 월요일, 1월 1일, 명절 당일은 휴관한다.
권정생동화나라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달리면 권정생 선생이 거주한 조탑마을에 닿는다.
선생은 이곳 일직교회의 종지기로 문간방에 살며 《강아지 똥》 《몽실 언니》 등을 썼다.
교회와 종탑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선생은 1983년 마을 청년들이 빌뱅이언덕 아래 마련해준 작은 집으로 이사한 뒤,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하며 홀로 지냈다.
선생은 “조용하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어 참 좋다”고 편지를 썼다. 담벼락도 대문도 없는 집은 단출한 이정표와 텃밭, 개집, 변소 등이 있으며, 단칸방 문고리에는 누군가 두고 간 꽃이 매달렸다.
안동 가을 여행은 문향(文香)이 서린 유서 깊은 공간이 함께해 운치를 더한다.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가운데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이 안동에 있다.
하회마을 인근의 안동 병산서원(사적 260호)은 호젓한 정취와 건축미가 돋보인다.
서애 류성룡이 후학을 양성한 곳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남은 사액서원 중 하나다. 병산서원으로 들어서는 길은 숲이 깊은 비포장도로이며, 서원 앞으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른다. 만대루 앞으로 펼쳐지는 강과 산의 풍경이 압권이다.
국도35호선을 따라 봉화로 향하면 안동 도산서원(사적 170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낙동강의 풍취와 어우러진 도산서원은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의 흔적이 담긴 곳이다.
서원은 퇴계가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서당 영역, 사후에 유림들이 그를 기려 세운 서원 영역으로 나뉜다. 책을 보관하고 열람하는 동·서광명실, 〈도산십이곡〉을 비롯한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 등에서 세월의 온기가 배어난다. 비탈진 언덕에 강을 바라보고 선 건물 배치가 독특하며, 강 건너에는 정조가 퇴계를 흠모해 과거를 치른 것을 기념하는 시사단이 있다. 대강당인 전교당(보물 210호)은 현재 보수 중이다.
도산서원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면 강변 비경이 하나둘 베일을 벗는다. 절경 속에 들어앉은 고산정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강나루 배경으로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낙동강 변 암벽이 탄성을 자아내는 정자로, 이황의 제자 금난수가 세웠고 이황과 여러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 고산정 앞 가송리에는 〈어부사〉를 지은 농암 이현보의 고택인 농암종택이 강가에 들어서 가을밤의 운치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