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노예계약." "돈줄 쥔 갑(甲)의 횡포."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운 대형 보험사 사슬에 묶인 영세 자동차 정비업계가 울부짖고 있다. '협력사'라는 가면을 쓴 손해보험사들은 우월적 지위로 동네 정비사를 옥죈다. 수리비용 단가 후려치기와 미납·지급 지연은 차고 넘친다. 불만 표시로 낙인찍힌 업체는 소송에 휘말리기 일쑤다. 업계 갈등을 풀어야 할 정부와 관계 당국은 강 건너 불구경이다. 본지는 업태 질서를 황폐화시키는 손보사 갑질 민낯을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손보사 횡포에 정비업계 "살려달라"...공임비 '후려치기'
② 홍원학·김정남 "협력업체와 상생" 헛발질…손보사 수리비 미납 '고질병'
<계속>
"상호 신뢰와 공존의 가치 아래 협력업체와는 상생 관계를 구축하고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의 꿈과 희망이 이어질 수 있도록 따뜻한 나눔의 실천에도 적극 나섬으로써 고객과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이 되겠다" - 홍원학 삼성화재 대표이사(최고경영자·CEO)
"협력업체 입고 지원 시스템과 인프라를 제공해 더욱더 선진화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속적인 상생 교류 확대를 위한 아낌없는 지원을 통해 상생 경영의 값진 성과를 이뤄낼 것" - 김정남 DB손해보험 CEO(부회장)
"기업 또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친환경, 친사회,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경영 활동을 강화하고 재무적 성과뿐만 아니라 비재무적 가치 성과를 창출하는 것이 필수적인 상황" - 조용일·이성재 현대해상 CEO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 사회 구성원 모두와 상생을 추구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나눔경영을 실천함으로써 고객과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보험사가 되겠다" - 김기환 KB손해보험 CEO
삼성화재·DB손해보험·현대해상·KB손해보험 등 4대 손해보험사 CEO가 경쟁적으로 외친 "사회적 책임"과 "상생"의 실상은 헛구호였다. 역대급 순이익을 올리며 자동차보험업계 실적 통틀어 85%를 과점한 이들 4사가 공업사로 불리는 영세 정비업체를 상대로 수년째 수리비를 동결한 것도 모자라 제때 지급하지 않는 갑(甲)질이 만연하면서다.
손보사로부터 수리비를 받아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구조상 열등한 을(乙)의 위치에 놓인 정비업체들은 "벼랑으로 내몰린다"며 토로한다. 전 산업권 미래 경영 화두로 '환경·사회적 책임·지배구조(ESG)' 기조가 굳어지는 가운데, 유독 손보사들만 갑을 관계를 철저히 이용하며 ESG 대세를 역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2년째 떼인 돈"…'미수의 덫'에 걸린 정비업체
#1. 서울 금천구 소재 한 정비업체는 삼성화재로부터 2년 동안 수리비를 받지 못했다. 27일 이 업체를 찾아가 장부를 확인한 결과 2020년 8월 입고된 차량 수리비 20만원은 미수로 잡혀 있었다. 최근까지 삼성화재가 마땅히 지급해야 할 금액은 모두 500만원에 달했다.
업체 대표 A씨는 "(삼성화재 측에서) 처음에는 차주가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더니 지금까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안 주고 있다"며 "큰 금액은 아니지만 차일피일 지급이 미뤄지다 결국은 못 받고 흐지부지되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A씨는 보험 수리 후 비용을 제때 지급하지 않는 일은 업계 관행이 됐다고 했다. 특히 정식 협력업체 계약을 맺지 않은 손보사의 이런 미지급이 빈번한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정비업체는 삼성화재가 아닌 다른 손보사와도 계약이 체결돼 있었다.
수리비 미지급은 곧 정비 수가(酬價)를 결정짓는 공임을 이른바 '후려치기' 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정비업체가 맡는 작업 과정 중 일부가 누락했다는 이유로 그만큼 공임을 깎고, 정비업체가 이를 받아들일 때까지 수리비를 늦게 주는 꼼수가 대표적이다.
일례로 A씨 업체는 올해 초 한 손보사에 판금·도색 비용으로 100만원가량을 청구했다. 이를 위해 A씨 업체의 직원은 작업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청구서에 첨부했다. 실제로 이뤄진 작업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나 정식 협력사가 아닌 이 손보사는 차량 외부 철판을 갈아내는 작업 장면이 빠졌다며 26만원을 삭감했다.
정비업체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깎인 비용을 받거나 제대로 된 금액을 받을 때까지 미수로 남겨두는 수밖에 없는 처지다. A씨 역시 손보사가 제시한 비용만 받고 작업을 마무리했다.
#2.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B 업체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DB손보·삼성화재·KB손보 등으로부터 못 받은 수리비는 총 수천만 원대에 이른다. 취재 결과 이 업체 미납 장부에 현재까지 3개월 이상 지급이 늦어진 액수는 7000여만원에 육박하고 있다.
B 업체 측은 삼성화재와 KB손보의 경우 이달 말까지 수리비 지급을 약속했지만 DB손보는 이 같은 지급 이행 약속조차 없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손보사들은 사고 차량 소유자 간 과실 비율이 확정되지 않아 정비 수가가 조정돼 견적을 다시 산출하느라 현재까지 수리비가 지급되지 못했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손보사 전횡을 견디기 어렵다는 정비업계는 '미수의 덫'을 해결해야 한다고 하소연한다. 업체 대표로서 개인 대출을 받거나 보험 수리 이외 정비로 발생한 수익으로 구멍 난 잔고를 메워야 겨우 직원 월급을 줄 형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일종의 돌려막기가 손보사 횡포에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 된 셈이다.
"부품, 페인트값도 주지 못한 곳이 몇 군데 있다"고 귀띔한 A씨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마지막 한 마디를 요구하자 그는 "빚을 내면서까지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손보사 실적 잔치에 미지급도 한몫?…"과다 청구" 역정
정비업계는 매년 늘어나는 손보사 실적과 달리 비용 후려치기와 미지급이 지속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강조한다. 손보사 순익 증가는 정비업체를 상대로 횡포를 일삼은 결과라는 푸념마저 나온다.
우상향을 그리는 손보사 실적은 자동차보험 손해율이 낮아진 것이 주효했다. 손해율은 보험사가 보험 가입자로부터 보험료에서 가입자에게 지급하는 보험금의 비율이다. 손해보험협회에 따르면 상반기 4대 손보사 자동차보험 손해율은 76.7%로 집계됐다. 통상 80%대를 보였지만 교통사고가 줄어들면서 손해율도 감소했다는 분석이다.
미지급을 둘러싼 손보사-정비업계 간 첨예한 대립 속에 손보사는 자동차보험 손해율이 최근 들어 감소했고, 자동차보험 사업 자체는 적자에 시달려 왔다고 항변한다. 자동차보험(책임보험) 가입은 법적 의무인 만큼 수익을 내기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손보사는 오히려 일부 정비업체가 수리비를 과다 청구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삼성화재 관계자는 "지금은 (보험사가) 근거 없이 수리비를 깎거나 안 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며 "공업사가 수리 항목을 임의로 입력하거나 작업 시간을 늘려 청구한 데 대해 전체 금액의 5~10%가 삭감되는 수준"이라고 해명했다.
수리비가 지급되지 않거나 늦게 지급되는 데 대해서도 양 업계 해석이 엇갈린다. 손보업계는 "개별 작업 건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며 일부러 수리비를 안 주는 건 아니라고 일축했다. 통상적 사유는 A씨 업체 사례처럼 과실 비율 문제로 사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먼저 정해져야 한다는 전언이다.
정비업계는 "일단 차를 수리한 이상 보험사든 차주든 돈을 지급하는 순리"라며 "결국 차주와 손보사 사이에 끼여 피해를 보는 곳은 정비 공업사들"이라고 맞받아쳤다.
이런 갈등 양상에서 4대 손보사 순익 합계는 △2019년 1조4016억원 △2020년 1조7542억원 △2021년 2조5934억원 등 증가세가 뚜렷하다. 4사는 올해 상반기에만 작년 순익 총합과 맞먹는 2조828억원을 벌어들였다. 업계 1위인 삼성화재가 7499억원으로 가장 많고 DB손보(5626억원), KB손보(4189억원), 현대해상(3514억원)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