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기업을 일으키기는 어렵지만 이를 반석 위에 올려 번창시키기는 더 어렵다. 예로부터 여러 왕조의 창업 군주와 더불어 치세를 한 군주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후계자를 정하는 창업주는 고심을 거듭하고 때때로 상속 분쟁이 이어진다. 기업 승계 구도를 보면 한 국가의 경제 체제와 기업문화를 엿볼 수 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기업집단 10곳 중 7곳은 승계 중…막 오른 '大승계시대'
②'삼성 마지막 후계자' 이재용, 지배구조 개편 묘수는
<계속>
삼성이 본격적인 이재용 시대를 열었지만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큰 과제는 여전히 미완이다. 삼성 내부에서도 여러 번 검토됐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고(故) 이건희 회장 별세 후 계열사 지분을 상속받으며 이재용 회장 본인이 보유한 지분이 다소 늘어나는 정도였다. 지배구조 개편은 언젠가는 풀어야 할 숙제다.
최근 삼성 지배구조 개편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이른바 '삼성생명법'이라고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국회 회의 석상에 오르면서다. 19일 국회에 따르면 지난달 22일 정무위원회는 보험업법 개정안을 논의했다. 삼성이 자발적으로 추진하기 전에 국회 입법에 의해 강제로 지배구조를 개편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른 셈이다.
재계에서는 지난 8월 이재용 당시 부회장 사면 복권을 계기로 삼성이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본격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은 지난해 컨설팅 회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지배구조 개편 관련 용역을 맡겼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는 지난 10월과 11월 각각 이재용 회장, 삼성전자 사업지원TF와 회동했다.
◆합법을 위법으로…삼성, 입법 만능주의 희생양 되나
삼성 지배구조 개편은 다른 여느 대규모 기업집단보다 그 수가 복잡하다. 이재용 회장으로서는 따져볼 변수가 한두 개가 아니다. 2020년 5월 이 회장이 "4세 승계는 없다"고 언급하면서 본인 이후의 삼성을 누가 어떤 식으로 끌어갈지 답안을 내야 한다. 당장에는 지배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계열사 간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삼성생명법은 이재용 회장에게 날벼락과 다르지 않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0년 6월 발의한 이 법안은 앞선 19대와 20대 국회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발의됐다가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21대 국회 들어서도 2년 넘게 잠자다 급작스럽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원회에 상정됐다.
개정안에 따르면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보유 중인 다른 삼성 계열사 주식을 대량 처분해야 한다. 법안은 보험사의 자산운용비율을 산정할 때 채권·주식 소유 금액을 취득원가가 아닌 시가를 기준으로 바꾼다. 보험사는 가입자에게서 유치한 보험금으로 여러 곳에 투자해 수익을 내는데 여기에는 주식도 포함된다. 이때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보험사가 보유할 수 있는 타 회사 주식을 총자산의 3%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현재 산정 기준은 주식 취득원가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주식 5억815만 주를 보유 중이다. 1980년대 유배당 보험(보험금 운용 수익을 가입자에 배당하는 보험)을 공격적으로 판매하면서 삼성전자 주식을 사들였다. 당시 취득원가는 1071원이다. 지난 16일 종가는 5만9500원으로 취득원가보다 55배 이상 뛰었다. 지난 3분기(7~9월) 말 기준 삼성생명 총자산은 314조원인 데, 삼성전자 주식을 시가로 평가하면 10%에 육박하는 30조원 수준이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이 팔아야 하는 삼성전자 주식은 20조~23조원에 이른다. 삼성생명 총자산의 3%인 약 10조원만 빼고 다 처분해야 위법이 아니다. 수십 년 전에 사들여 합법적으로 보유 중인 주식이 법 개정으로 한 순간에 위법으로 바뀌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셈이다. 애써 개정안대로 주식 보유 한도를 맞춰도 주가 변동에 따라 어제는 합법이 내일은 위법이 될 수도 있다.
법 개정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취득원가가 아닌 시가로 자산을 평가하는 것이 보험업에 도입되는 새 국제회계기준(IFRS)인 IFRS17의 취지에 맞는다고 주장한다. IFRS17은 보험부채(가입자에게 지급해야 할 보험금)를 원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한다. 그러나 보험사의 재무건전성을 평가하는 것과 주식 보유 한도를 시가로 평가해 규제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얘기다.
법안을 발의한 박용진 의원은 삼성 지배구조 개편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개정안은 보험사의 자산운용 안정성 제고를 명분으로 내세워 삼성을 압박하려는 의도다. 기업 지배구조 개편을 입법으로 강제함으로써 입법만능주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승계 구도서 '4세'는 공백…'포스트 이재용' 대안 있나
박 의원이 낸 보험업법 개정안은 삼성생명·삼성화재와 삼성전자 간 지분 연결고리를 강제로 끊어 버리는 법이다. 이재용 회장은 개인 지분 1.63%에 더해 삼성물산(17.97% 보유)과 삼성생명(10.44%)을 통해 삼성전자를 지배한다. 삼성물산과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각각 5.01%, 8.51%다. 또한 삼성물산은 삼성생명 지분 19.34%를 갖고 있다.
삼성 지분 구조를 요약하면 삼성생명을 필두로 한 금융 계열사와 삼성물산에서 삼성전자를 거치는 비금융 계열사로 나뉜다. 삼성의 순환출자 구조는 '이재용→삼성물산→삼성전자'로 가는 출자 고리, '이재용→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고리, '이재용→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연결되는 고리가 핵심이다.
삼성생명에서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는다면 그만큼 이재용 회장의 삼성전자 지배력은 약해진다. 법 개정 이후 삼성생명이 내놓은 삼성전자 지분을 삼성물산 등 다른 계열사가 사거나 자사주로 매입하는 방안도 거론되지만 수십조원이 든다. 신사업 투자 재원으로 쓸 돈을 고스란히 지배구조 개편에 태워야 할 수 있다.
이재용 회장의 머릿속은 한층 복잡할 수밖에 없다. 4세 승계는 없다고 공언한 만큼 자신 이후의 삼성은 누가 어떻게 꾸려갈지를 생각해야 한다. 내년 55세가 되는 이 회장 나이를 고려하면 차기를 논하기는 매우 이르지만 삼성이 처한 상황을 보면 시간적 여유가 많지는 않다. 이 회장은 슬하에 1남 1녀를 뒀는데 경영 수업을 받기에는 나이가 한참 어리다.
4세 공백에 대한 해답이 없는 한 삼성은 주인 없는 회사로 전락할 수 있다. 총수 일가는 지분만 소유하고 경영은 전문 경영인이 맡는 형태다. 당장 삼성전자를 보더라도 보험업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현재 2대 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의 입김이 커진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은 7.68%로 삼성생명 다음으로 많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로 기업에 비상이 걸린 악몽이 재현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총수 일가의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투기 자본이 경영권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도 상존한다.
과거 삼성은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을 시작으로 이건희 회장에 이르기까지 총수의 카리스마가 성장 밑거름이 됐다. 가족 경영을 통해 일사불란하게 의사결정을 하고 중요한 투자를 결단했다. 기업 몸집이 커지고 2세 경영 체제로 이행하면서 CJ, 신세계, 새한 등으로 계열분리가 이뤄져 한국의 재계라는 독특한 유기체를 형성했다.
이재용 회장은 선대 회장과 비교해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정도가 훨씬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 계열사는 이미 전문 경영인 체제로 움직인다.
그러나 계열사 전반을 아우르는 중요한 결정은 여전히 총수인 이 회장 몫이다. 그룹 컨트롤타워의 필요성은 여기서 생겨난다. 삼성은 2017년 미래전략실을 폐지하고 사업지원TF(삼성전자), 금융경쟁력제고TF(삼성생명), EPC경쟁력강화TF(삼성물산) 3개 조직을 운영 중이다. 지배구조 개편 같은 사안은 분산된 조직 체계에서는 다루기 어렵다. 국회가 법을 고쳐 삼성 지배구조 개편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고가기보다는 삼성이 스스로 '포스트 이재용'에 대한 답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