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토끼의 해, 신년 초부터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건 이 다섯 글자였다. 지난 6일 입주 첫날이던 충북 충주시 호암지구의 제일풍경채 아파트,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인 이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이 사전에 한 차례 아파트 내부 사전점검을 하며 표식지를 붙여 하자보수를 신청한 벽에 누군가 조롱하듯 써놓은 문구였다.
이날 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폭로된 ‘그냥 사세요’ 아파트 입주자들에게 기막힌 것은 낙서뿐 아니었다. 칠하다 만 천장, 마감이 덜 된 방문과 현관문, 벽지를 붙이다 만 실내 곳곳, 금이 가거나 아파트 바깥 풍경이 다 보이도록 틈새가 벌어진 콘크리트 벽… 그중에서도 압권이 하자는 그대로 둔 채 그 옆에 써놓은 이 다.섯.글.자.였다.
임대아파트를 둘러싼 우리 사회 갈등은 그 뿌리가 깊다. ‘저소득층 거주 지역’이란 기존 인식이 있어 온 데다, 지난 2003년부터 재건축아파트 건축 시 일정 비율의 임대아파트 건립을 의무화되자 일반 아파트와 다른 출입구를 만들기도 하고, 같은 학교에 다니는 같은 아파트단지 아이들인데도 임대아파트 아이들은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계급의 벽’이 되기도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임대아파트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고, 어느덧 청년이 취약계층으로 간주 되는 사회가 되면서 청년·신혼부부를 위한 임대주택마저도 건립 계획이 발표되면 해당 지역주민들이 “집값 떨어진다”며 시위를 벌이는 ‘님비현상’이 벌어지곤 했다.
모든 건물이 서로 어깨가 닿을 듯 가까워 더욱 서러운 서울·수도권을 벗어나 공공기관이 자금을 대고 민간업자가 건설을 맡는 임대주택들이 등장했다. “그냥 사세요” 논란을 빚은 아파트 역시 74~84㎡ 총 874가구 규모의 공공지원 민간임대 주택이다. 입주 지정 기간은 지난 6일부터 2월 28일까지인데, 입주 첫날 입주자들이 기함할 일을 겪은 것이다. 어쩌다가 하자 보수를 맡았거나 하자보수 현장을 지나던 누군가의 마음에까지 “니들은 그냥 살아도 돼” 하는 심리가 깃들었을까.
한국부동산원 청약홈에 따르면 지난해 공급된 전국의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 단지 대부분 두 자리 수 경쟁률까지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호암지구 제일풍경채 역시 시중 금리가 계속 오르자 합리적인 비용에 장기 거주가 가능한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 청약에 나선 이들이 지난해 9월 선택한 보금자리였다.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 청약은 요건도 까다롭지 않다. 만 19세 이상 주택을 소유하지 않은 대한민국 국적자라면 누구나 청약이 가능하다. 임대료는 주변 시세 대비 95% 수준이며, 신혼부부·청년의 경우 더 낮은데다 임대료 상승률은 연 5% 이내로 제한돼 최대 10년까지 계속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사세요”란 낙서를 남길 만큼 임대주택이란 편견의 벽을 넘지 못했다. 조롱성 낙서가 공분을 불러일으키자 세계 최대 가전·IT전시회인 CES 참관을 위해 미국에 머물던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이 9일 새벽(한국 시간) 사회적관계망서비스(SNS)에 분노를 표하며 “전수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진화에 나섰다. 국토교통부는 12일 공공지원 민간임대 주택에 대한 하자 민원 전수 조사 방침을 밝혔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입주한 공공지원 민간임대 주택 약 5000채를 대상으로 실시한다.
이번 전수 조사를 통해 공공지원 민간임대 주택의 각종 부실이, “그냥 사세요”란 얄팍한 거만이, 호암지구에만 그친 것이길 빌어본다. 그렇지 않으면, ‘내집마련’이 한 단어가 될 만큼 절실한 우리 사회에서 공공지원이란 말을 믿고 임대주택에서나마 보금자리를 틀고자 찾아든 이들에게 두 번 상처 주는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