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삼성은 시장을 장악한 모토로라 휴대폰을 따라잡겠다며 생산량을 늘리는 데 급급했다. 질보다 양에 치중하면서 휴대폰 불량률은 11.8%까지 치솟았다.
격노한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은 "시중에 나간 제품을 모조리 회수해 공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 없애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날의 사건을 '애니콜 화형식'이라 말했고 훗날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하게 된 ‘갤럭시 신화’를 이끄는 힘이 됐다고 평가했다.
2011년엔 '인사'라는 방식으로 파격 행보를 보였다. 이 선대회장이 삼성의 연말 인사 관례를 깨고 7월 1일 주요 계열사 사장과 임원을 교체했다.
깜짝 인사라고는 하지만 예고편은 있었다. 이 선대회장이 2010년 경영에 복귀하면서 사내 게시판에 남긴 “앞으로 10년 이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글에는 위기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 삼성은 LCD 사업부가 패널 수익성 감소 등으로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인사의 이유도 ‘실적 부진’이었다. 액정표시장치(LCD) 사업부장이던 장원기 사장을 경질하면서 LCD 사업부를 메모리·시스템LSI 등 반도체 사업부와 묶었다. 디바이스솔루션(DS) 사업 총괄은 그렇게 신설됐다. 현재 삼성전자 매출과 영업이익을 이끄는 DS부문의 출발이었다.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때면 ’화형식‘과 ’불시 인사‘로 체질 개선 의지를 보여주며 기회를 잡은 삼성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말과 오버랩된다.
케네디는 “중국인은 '위기(危機)'를 두 글자로 쓴다. 첫 자는 위험(危)의 의미, 두 번째 글자는 기회(機)의 의미”라며 “위기 속에서 위험을 경계하되 기회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위기는 기회’라는 말로 쓰이게 됐다.
최근 삼성은 ‘위기’라는 단어를 또 다시 꺼냈다. 예고되지 않은 인사를 단행한다는 내용이 담긴 보도자료를 통해서다. 이재용 회장이 이번 인사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메시지를 냈다는 해석도 나왔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는 과거와 사뭇 다르다. 일단 삼성전자의 매출을 이끄는 반도체는 말 그대로 기업부터 국가까지 참전하는 글로벌 전쟁터가 됐다. 미국 정부는 중국을 상대로 무역 장벽을 높여 견제하는 동시에 자국 반도체 산업에 도움이 된다면 외국 기업이라도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 유럽의 국가들도 다르지 않다.
미국의 엔비디아나 대만의 TSMC가 전 세계 기업과 국가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사이에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던 삼성은 밀리고 있다. 한국 패싱 얘기도 나오고 있다.
국내 사정도 좋지 않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은 29일 파업을 선언했다. 1969년 삼성전자 창립 후 첫 파업인데 하필 조합원 대부분이 반도체 사업을 하는 DS부문에서 근무하고 있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주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용 회장의 2심 재판도 지난 27일부터 시작됐다. 올 초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며 한숨 돌리던 차에 최근 미국계 헤지펀드 메이슨 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분쟁 중재(ISDS)에서 승소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한 판결이어서다. 지난해 같은 이유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제기한 소송에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가 중재판정문에 적시하지 않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회장 간 '공모' 사실을 메이슨 판정문에는 명확히 담아 2심에도 악영향을 줄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배상액에 대한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위험한 이슈들이 혼재돼 있는데도 삼성 내부에선 이번 인사를 두고 “단순히 실적 문제라기보다 분위기를 쇄신할 강한 인물로 교체한 것”이라며 위기론을 애써 축소하고 있다.
"낙관주의자는 위기 속에서 기회를 보고, 비관주의자는 기회 속에서 위기를 본다"는 영국 윈스턴 처칠의 말을 삼성에 건네고 싶은 이유다.
지금 삼성은 낙관주의자가 될 것인지, 비관주의자가 될 것인지 판단해야 할 때라는 얘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