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의 삼성, 기술의 삼성. 과거 삼성전자를 설명하던 칭호입니다. 그러나 최근 방문한 가전·반도체 전시회에서 삼성전자는 몰입감과 리더십이 부재한 '공백의 삼성'을 방증하는 것 같았습니다.
국내 최대 가전 전시회인 한국전자전과 반도체 전시회인 반도체대전이 지난 23일과 2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나란히 열렸습니다. 삼성전자는 두 행사에 모두 참가해 부스를 차렸습니다. 자연스럽게 가전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는 LG전자,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경합하고 있는 SK하이닉스 부스와 각각 비교해 볼 수 있었습니다.
두 행사에서 삼성전자의 공통적인 부스 콘셉트는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부스의 기본 색으로 흰색을 선택해 탁 트인 느낌을 주고 내부엔 빈 공간을 크게 만들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했습니다. 곳곳엔 삼성전자가 자랑하는 갤럭시 인공지능(AI) 기능을 체험할 수 있는 구역도 있었습니다.
반면 가전과 반도체에서 각각 경쟁하는 LG전자와 SK하이닉스는 사뭇 달랐습니다.
한국전자전에 부스를 차린 LG전자는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인 공간을 만들어 놨습니다. 다큐관, 드라마관, 공상과학(SF)관, 액션관 등 4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서 순서대로 LG전자의 제품을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했습니다.
다큐관은 에어컨과 갈대밭, 거울로 꾸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드라마관에선 LG전자의 가전을 이용한 연극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SF관과 액션관도 특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반도체대전에 참여한 SK하이닉스는 부스 우측 전체에 게임기 여러 대를 설치했습니다. SK하이닉스에서 만드는 메모리 제품을 주제로 한 그림 찾기나 핀볼 게임 등을 설치해 놨더니, 관람객들이 긴 줄을 만들 정도로 참여 열기가 높았습니다.
SK하이닉스가 자랑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도 부스 중앙에서 자리를 지켰습니다. 쌀알을 가득 쌓아 놓고 최초의 메모리와 자사의 HBM 성능을 비교한 투명 플라스틱 조형물도 눈에 띄었습니다. 삼성전자가 HBM에 대해 다른 메모리 제품 중 하나로 취급하며 소개한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삼성전자의 두 부스와 LG전자, SK하이닉스 부스를 나오던 사람들의 반응도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몰입감'의 유무였습니다. LG전자와 SK하이닉스 부스를 나오던 사람들은 '집중이 잘 됐다'거나 '몰입감이 좋았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삼성전자 부스에선 들을 수 없던 소리였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반도체업계 주요 인사가 참석한 지난 24일 반도체대전 단체 관람에서도 삼성전자는 의외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삼성전자 임원급 인사가 행사장을 찾았음에도 정작 단체 관람엔 사람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강욱 SK하이닉스 부사장이 단체 관람에 참석한 것과 비교되는 지점입니다. 반도체 업계 1위라는 삼성전자의 자신감이 줄어든 게 아니냐는 '착시'까지 생기는 듯 했습니다.
이유는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올해 최악의 한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3분기엔 시장 컨센서스(전망치)를 1조원 가량 하회하는 실적을 내며 어닝쇼크를 일으켰고, 주식은 연일 연중 신저점을 갱신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삼성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공백의 삼성을 실속있게 채우는 과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참고로 27일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회장 취임 2주년입니다. 이틀 전이던 25일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4주기 추모식을 가진 직후 이 회장은 사장단과의 오찬에서 고인의 경영 철학 이외의 특별한 쇄신안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