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의 오척 삼푼, 두 발은 일척 팔촌이고 손발은 아직 굳지 않아 부드럽고 몸 여기저기 멍자국이 보이오", "키는 대략 62인치에 두 발은 대략 15인치 정도 얼굴에 울혈이 심하게 나타나 부어 보이오"
개화기 때 서울 명동에 있었던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이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각이 공존했다. 하나는 전통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고 둘째는 서양의학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같은 현상에 서로 다른 의학용어를 사용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인 '제중원 해부학'을 통해 우리 몸을 가리키는 우리말의 다양한 명칭들이 근대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기획특별전 '나는 몸이로소이다-개화기 한글 해부학 이야기'가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한글박물관에서 7월 19일부터 10월 14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제중원 해부학' 전질 3권을 비롯해 18개 기관 소장유물 127건 213점이 공개됐다.
박영국 국립한글박물관 관장은 최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평면적인 전시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전통적인 몸에 대한 생각과 서양의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언어문화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봤다" 며 "개화기 시절에 의학의 수용과정과 발간된 책들을 비롯해 우리 몸을 설명하는 우리 글과 말에 대한 모든 것을 한데 모아봤다"고 설명했다.
제중원은 1885년(고종 22)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의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한글 해부학 교과서가 '제중원 해부학'이다.
제중원 해부학은 일본 해부학자 이마다 쓰카누(1850~1889)의 '실용해부학'(1888·권1~3)을 제중원 의학생 김필순(1880~1922)이 우리말로 번역하고 제중원 의학교 교수 에비슨(1860~1956)이 교열하여 1906년에 펴낸 책이다.
전시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있다. 1부 '몸의 시대를 열다'에서는 몸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과 근대 서양의학의 관점 차이를 비교한다. 2부 '몸을 정의하다'는 한글 창제 이후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몸을 가리키는 우리말의 변화상을 보여준다. 3부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에서는 '제중원 해부학'을 소개하고 개화기에 발간된 여러 종류의 한글 의학 교과서를 살펴본다.
전시장 입구 들어서니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에서 일어난 가상 살인사건을 다룬 영상 작품이 놓여있다.
살인사건을 보고 서로 다른 의학용어를 쓰며 시신을 살피는 과정을 통해 개화기 때 전통의학과 서양의학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1부 '몸의 시대를 열다'
몸과 마음(정신)을 하나로 보는 동양의학과 달리 사람의 몸을 열어 아픈 부위를 고치고 다시 꿰매는 서양의학은 개화기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줬다.
전시된 조선 초기의 법의학서인 '신주무원록'과 '증수무원록'은 살인사건과 관련된 시시비비를 명백히 밝히기 위한 검시 지침서로 몸에 대한 전통의 관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자료이다.
조선 시대 때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죽음의 원인을 살피는데, 몸을 해부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흔적만으로 확인한다.
흔적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한 도구들도 전시됐는데, 독이 닿으면 색이 변하는 검시 도구인 '은비녀' 등이다.
동의보감과 경혈을 표시한 경혈도도 함께 전시해 전통시대의 몸에 대한 관점을 보여줬다.
반면, 서양의학에서는 몸을 해부하는 특징이 있다.
고종 임금의 어의였던 의사 분쉬가 쓰던 핀셋, 가위, 칼, 바늘, 목제함 등 외과 도구가 전시됐다.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들어오고 나서 말 표현이나 일반인의 대화 속에서도 서양의 근대 의학 지식이 나온다.
전시된 개화기 신소설 '빈상설'에서 "구학문으로 말하면 오장육부에 정신보가 빠졌다 할 만하고 신학문으로 말하면 뇌에 피가 말라 신경이 희미하다 할 만한.."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국은 19세기 말에 서양의학을 받아들였지만, 중국이나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100~200년 일찍 받아들이면서 인체 해부 기록이 만들어졌다.
일본은 1754년 사형수 시체를 해부해 기록을 남기면서 일본 근대 의학 발달의 시초가 됐다. 중국의 경우에는 서양의 선교사를 통해서 일찍 한문으로 된 해부학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다.
서양 선교사가 쓴 중국 의학서나 일본 최초의 서양 해부학 번역서를 통해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2부 '몸을 정의하다'
2부 '몸을 정의하다'는 '몸의 기둥 뼈와 근육', '마음의 집, 심장과 뇌',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기관', '서로 돕는 몸속 기관' 등 4부분으로 나눠 한글 창제 이후부터 1940년에 이르기까지 몸을 나타내는 우리 말들, 단어 등을 보여준다. 각 공간 안에서는 실제 이미지와 함께 내용을 볼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1446년)에서는 발뒤꿈치를 가리켜 발측이라는 단어를 썼으며 수정증보조선어사전(1940년)에는 관골(광대뼈)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조선 시대의 초상화를 분석해서 피부 병증과 관련된 것들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작품도 흥미롭다.
김홍도가 그린 서직수의 초상화에는 검버섯 10여 개가 보이며, 왼쪽 볼에는 색소모반(흑갈색의 원형 반점 또는 종양) 세 개도 있다.
조선 시대 문신인 이시방은 이마에는 마치 칼에 베인 듯한 상처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으며 오명항은 초상화에서 안면에 온통 천연두 흉터로 덥혀있다.
20세기 초 충남 보령에 있던 남자, 충남 예산에 있던 여자 등 개화기 때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들도 사진 작품으로 전시됐다.
쌍꺼풀눈, 족제비눈, 거적눈, 밥풀눈, 갈고리눈 등 눈과 코를 가리키는 다양한 명칭들을 미디어 작품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몸 밖에서, 몸 안으로.'라는 미디어 작품은 터치스크린을 통해 15세기부터 1940년에 이르기까지 인체를 가리키는 용어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우리 몸을 나타내는 말의 질서'에서는 몸의 위치는 다르지만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말들을 정리해 놨다. 예를 들어 통에는 '몸통' '머리통' '오줌통'이 있고 젖은 '귀젖' '목젖' 등이 있다.
▶3부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
3부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에서는 1906년 제중원에서 발간한 최초의 한글 해부학 교과서와 서양의 인체 해부학 교과서의 고전인 '그레이 아나토미', 일본의 '실용해부학', 국한문 혼용 해부학 교과서, 제중원에서 사용했던 14종 의학 교과서 등이 전시됐다.
특히 제중원 해부학 3권은 번역작업을 시작하고 최종적으로 책이 나올 때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에 번역한 원고가 사라지기도 했고 불타 없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 번역할 때는 서양의 유명한 '그레이 아나토미'를 번역했지만 결국 쉽게 번역할 수 있었던 일본의 '실용해부학'을 번역해 완성했다.
고은숙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사는 "다른 기관에도 1906년 간행된 초간본 해부학이 있지만 한글박물관에만 유일하게 3권 전 세트가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전권이 일반인에게 공개됐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