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반도체 투자 보조금 지급 조건을 공개했다. 보조금 지급 대상에는 반도체 연구개발(R&D), 설계, 생산, 패키징 등 반도체 전 과정이 포함됐다. 자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보조금 지급 조건에는 독소조항이 대거 포함됐다. 미국은 보조금을 받는 기업에 군사용 반도체 공급 참여까지 요구한 상황이다. 이뿐 아니라 반도체 공장을 새로 지을 때 미국에서 생산된 건축 자재를 사용하라고 권고했다. 보조금 1억5000만 달러(약 1968억6000만원) 이상을 받은 기업이 보조금 신청 당시 제출한 기대 수익 전망치보다 초과 이익을 냈다면 지급한 보조금의 75%까지 환수한다.
경제·산업 문제를 자국 안보 강화, 패권 확대와 결부시키면서 미국 안팎에서 크고 작은 논란이 불거졌다. 기업이 운영 중인 실험·생산 시설에 접근할 권한까지 미국 국방부에 제공하는 조항을 두고선 기술 유출 가능성도 우려됐다. 또한 보조금 환수 정책으로 투자 경제성이 낮아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을 견제한다는 법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미국이 전 세계 반도체 기업을 상대로 '갑질'을 일삼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제시된다. 미 상무부도 "해외 기업 공장도 미국의 안보 이익에 기여해야 한다"고 밝히며 사실상 자국 이기주의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보조금 관련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는 가운데 미국은 이달 중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과 관련한 세부 지침까지 내놓을 예정이다. 가드레일 조항은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중국을 비롯해 국가 안보를 저해할 가능성이 있는 '우려 국가'에 10년 간 반도체 제조 시설 확장 등을 금지하는 내용이 골자다. 가드레일 조항이 적용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서 추가 투자나 증설을 사실상 할 수 없게 된다.
급박해진 상황과 달리 국내 반도체지원법 처리는 여전히 지연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반도체 한파를 녹이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야당은 '재벌 특혜'라며 반발해 왔다. 정부·여당이 거대 야당을 끝내 설득하지 못한다면 이달 중 처리도 불투명하다.
당장 반도체 수출이 1년 전보다 급감하며 발등의 불이 떨어진 상태다. 산업통상자원부 수출입 동향 자료에 따르면 2월 반도체 수출은 전년(2022년) 대비 42.5%(약 44억 달러) 급감하면서 7개월째 하락세를 보였다. 증권가에서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과 SK하이닉스가 1분기(1~3월) 6조원 규모 적자를 볼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한국 기업 주력 품목인 D램 가격은 지난 1월 18.10% 급락한 뒤 2월에는 보합세를 이어갔다. 수요 위축과 재고 압박 등 악조건이 이어지며 이달 중 가격 반등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