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한국에서 대기업 총수가 경영권을 물려받으려면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국세청과 검찰 등 사정기관과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그것이다. 이 3곳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법정이 기업인을 맞이한다.
이른바 대규모 기업집단 76개 총수 가운데 사법 처리 전력이 없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24일 현재 자산총액 기준 상위 10대 그룹 중 총수가 있는 대기업집단을 기준으로 총수 일가가 배임·횡령으로 재판이나 처벌을 받은 곳은 절반에 이른다.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삼성, SK, 롯데, 한화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선대 회장과 배임·횡령 외 사건으로 대상을 넓히면 그 현대자동차, LG, GS 등도 총수가 집행유예 이상 형을 선고받은 불명예를 안았다.
삼성은 고(故) 이건희 회장이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받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016년 말 소위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되며 2차례나 수감 생활을 했다. SK는 최태원 회장이 2012년 회삿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아 검찰로부터 기소됐고 롯데는 신동빈 회장이 2016년 증여세 포탈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례가 있다.
일감 몰아주기 논란도 오너 일가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특정 계열사에 다른 계열사들 일감을 몰아줘 실적을 높이고 그에 따른 성과급이나 배당을 총수 일가가 챙겼다는 뉴스는 공정위 브리핑의 단골 소재다.
배임이나 횡령, 사익 편취 의혹은 대부분 기업 지분과 경영권을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과정에서 불거진다. 승계가 합법적인 틀 안에서 이뤄지기보다는 늘 사법 리스크를 떠안은 채 진행된다. 재벌 중심 경제 구조를 비판하는 시민사회 쪽에서는 오너 일가의 도덕적 해이, 그리고 이들에 집중된 지배구조, 거수기로 전락한 이사회, 사회적 감시망의 부재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재벌과 오너 경영이 한국의 특수한 제도?
국내에서 승계 문제에 대한 비판은 재벌 개혁으로 귀결된다. 한 가문이 소수 지분만으로 수십개에 이르는 계열사를 거느리고 기업집단에서 군주처럼 군림하는 전근대적 관습이 깊이 뿌리 내렸다는 게 핵심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오너가 경영에 개입할 여지를 줄이고 기업 의사결정의 축을 이사회로 옮겨야 한다.
재벌은 한국만의 특수한 기업 지배 형태라고 잘 알려져 있다.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재벌이 고유명사인 'Chaebol'로 등재된 얘기는 유명하다. 옥스퍼드 사전은 재벌을 "한국 대기업의 한 형태"로 정의한다.
국내 학계에서는 재벌을 몇 가지 특징으로 규정한다. 가족 소유 기업이면서 이들이 직접 경영하고 여러 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형태다. 가장 큰 특징은 정부와 유착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장기간 이어진 개발 독재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경제사 연구자들은 미군정이 일본으로부터 몰수한 적산(敵産)을 불하하고 정부가 외국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기반 시설 건설과 산업화를 주도하면서 재벌이 그 혜택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옥스퍼드대가 사전에 'Chaebol'을 등재하면서 굳이 '한국 대기업'이라고 콕 집은 이유도 대기업집단이 성장한 역사적인 맥락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계에서는 국내 대기업이 마치 '온실 속 화초'처럼 정부의 비호로 컸다는 데 반대한다. 1~2세대 기업인들은 허허벌판에 공장을 짓고 해외 선진 기술을 도입해 끊임없이 혁신을 이뤘다. 경제계는 '기업가 정신'이 오늘날 굴지의 기업을 만들어 냈다고 강조한다.
역사적 맥락을 빼면 재벌을 한국만의 특수한 체제로 볼 수 있는지는 단정짓기 어렵다. 유럽은 물론 미국이나 일본에도 한 가문이 소유하면서 경영에 참여하는 기업이 존재한다. 미국 포드, 독일 헨켈과 BMW, 네덜란드 하이네켄, 스웨덴 발렌베리, 일본 도요타와 혼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기업 모두 짧게는 수십년, 길게는 100년 넘게 존속하면서 대대로 승계가 이뤄졌다. 승계 문제 역시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포드와 BMW, 발렌베리家 승계의 비결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해외 오너 기업 승계 사례를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 번째는 기업을 승계하는 종합적인 계획이 있었고 가족 구성권 사이에 정서적 유대감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승계 과정에서 상속세와 증여세 부담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또 다른 공통점은 가족의 기업 지배력이 약화되지 않도록 노력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합법적인 범위에서 승계가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해외 대기업 승계 사례 가운데 국내에도 자주 소개되는 곳은 포드, BMW, 발렌베리 등이다. 이들은 각자가 속한 국가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여러 세대에 승계를 거듭했다.
포드는 1935년 무렵 처음 승계를 진행했다. 창업자인 헨리 포드가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과 재단 설립을 통해 기업을 승계하는 밑그림을 그렸다. 당시 미국은 정부 주도로 뉴딜 정책을 시행하며 경제대공황 극복에 나섰는데 상속세를 비롯해 대대적인 증세가 이뤄졌다. 그러자 포드는 공익재단을 설립해 상속·증여세 부담을 덜었다. 일반 주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갖는 주식을 가족이 나눠가진 점은 반복된 승계에도 지배력을 유지하는 밑거름이 됐다.
BMW는 지분 관리회사를 별도로 설립하는 방식을 취했다. 지분 관리회사는 여러 자회사를 지배하는 기능을 갖지만 한국의 지주회사와는 다르다. 지주회사는 설립 요건이 법으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반면 독일의 지분 관리회사는 설립과 운영이 훨씬 자유롭다. 지분 관리회사는 BMW를 소유한 크반트 가문이 상속세를 줄이면서 지배력을 유지하는 통로였다.
발렌베리그룹이 있는 스웨덴은 대외 의존도가 높고 대기업 중심 산업 구조를 가졌다는 점에서 한국과 비슷하지만 승계 문화는 많이 다르다. 발렌베리 가문은 100년 넘게 거대 기업집단을 소유해 왔는데 일반 주주의 100배, 많게는 1000배까지 의결권을 갖는 차등의결권 주식이 지배력을 유지한 원동력이 됐다.
발렌베리 사례가 특이한 점은 노동조합이 오너 일가의 승계와 차등의결권 보유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스웨덴은 1938년 노사 대타협으로 복지국가 건설을 이뤄냈는데 수준 높은 복지를 유지하려면 그 돈을 마련하는 대기업이 외국 자본에 넘어가지 않아야 하고 오너 일가가 안정적으로 지배력을 가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높은 '합법'의 벽, '준법경영' 의지만으론 역부족
앞선 해외 오너 기업 승계 사례에서 나타난 4가지 공통점 가운데 국내에서는 '합법적인 범위'가 늘 문제가 됐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 승계 구도를 합의했다 하더라도 높은 상속세와 이에 따른 지배력 약화 우려 때문에 법의 테두리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수밖에 없다. 창업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갈 때 '왕자의 난'이나 '형제의 난' 같은 경영권 분쟁이 일어난 사실에 비춰 보면 가족 간 협약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 승계를 앞둔 오너 일가를 범법자로 만드는 뇌관은 최고세율 50%에 이르는 상속세다. 아무리 부자라도 저 많은 세금을 정직하게 내면 3대를 못 간다는 게 한국 상속 제도다.
지주회사에 대한 과도한 규제도 합법적인 승계를 방해하는 요소로 지목된다. 지금이야 지주회사가 이른바 건전한 지배구조의 출발처럼 여겨지지만 한국에서는 1986년부터 1999년까지 설립이 금지돼 있었다. 상황이 이런 탓에 많은 대기업이 계열사끼리 물고 물리는 지분 관계에 놓이는 순환출자 구조를 택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편법·탈법 승계를 부추기는 요인이 됐다. 현재는 지주회사가 자회사 지분 30%(비상장사 50%) 이상을 보유한 때에만 해당 회사를 거느릴 수 있다.
지분 관계는 복잡하고 상속세는 높다 보니 상당수 오너 일가가 지배력을 유지할 다양한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 미국처럼 공익재단을 활용한 승계도 불가능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인들은 일감 몰아주기, 배임·횡령 같은 위법 행위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환경에 노출돼 있다"고 꼬집었다. 최근 삼성과 SK 등 대기업집단을 중심으로 '준법경영'과 이사회 권한 강화 움직임을 보이지만 기업의 의지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와 달리 시민사회에서는 더 강력하고 원칙적인 법 적용과 승계 과정의 투명성, 공정성 등을 요구한다. 신동화 참여연대 간사는 "오너가 경영을 잘하고 회사 이익을 창출한다면, 그리고 준법경영을 한다면 (오너 경영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라면서도 "이사회가 오너를 견제하지 못하고 (오너 일가가) 부당하게 일감을 몰아줘 회사와 주주, 직원에 손해를 끼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오너 일가 스스로 승계를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앞선 해외 기업 사례를 보면 오랜 기간 경영 능력을 검증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개인 최대주주로서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 맡기고 성과에 따른 배당을 받는 오너도 있다. 신 간사는 "(기업 후계자가) 전제군주제로 비교하면 성군일 수도 암군일 수도 있다"면서 "경영 능력이 검증된 사람이 주주나 이사회로부터 지지를 받아서 총수가 돼야 하고 이들이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못하게 견제할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