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그룹 오너 3세인 유 사장은 여러 모로 참 특이한 인물이다. 여느 기업 오너 3·4세보다 빠르게 승계 코스를 밟으면서 그 흔한 프로필 사진 하나 공개되지 않았을 정도로 베일에 가렸다. 재계 서열 68위 기업의 사장이자 후계자라기엔 알려진 내용이 전무하다.
유석훈 사장을 처음 추적한 때는 3개월 전이다. 기업마다 승계 구도가 어떻게 흘러갈지 뜯어보는 와중에 우연히 유진그룹을 떠올렸고 취재에 들어갔다.
가계도와 지분 구조를 그리고 유 사장의 행보를 파악하려 했으나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얼굴이라도 찾기 위해 수소문을 거듭했다. 몇 다리를 건너 어렵사리 고등학교 졸업앨범 사진을 구했고 찝찝함을 남긴 채 기사가 나갔다(본지 2월 28일자 <'실적·지분·전략' 없는 유진그룹 3세 유석훈…멀어진 승계의 꿈> 참조).
공교롭게도 신문이 윤전기를 갓 통과한 날 유진그룹은 정기 인사를 발표하며 유석훈 당시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유 사장은 지난해 임원 인사에서 전무를 건너뛰고 곧바로 부사장을 달았다. 상무에서 사장까지 2년 만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보통 이 정도 빠른 승진이 이뤄질 땐 그만한 이유가 붙는다. 어떤 사업을 주도해서 좋은 성과를 냈다거나 공격적으로 인수합병(M&A)을 이끌어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거나 하는 등이다. 앞선 기사에서도 언급했듯 유석훈 사장에겐 이렇다 할 실적이 없었다. 심지어 회사가 낸 자료에도 왜 승진이 그토록 빠른지 설명 한 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사진은 없었다.
얼굴 없는 후계자는 외려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유 사장이 어디로 출근하는지, 어떤 업무를 하는지 궁금했다. 중견급 기업을 책임질 인물이라면 최소한의 검증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못해도 여태 공개된 적 없는 사진이라도 건지고 싶었다. 결국은 그의 집무실을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유 사장이 출근할 것으로 추측되는 4곳 가운데 서울 여의도에 있는 유진빌딩과 파크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유진빌딩은 2020년 10월까지 유진기업 본사가 입주한 곳으로 현재는 유진투자증권이 사용 중이다. 이곳에서는 유 사장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파크원은 아예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입주사를 확인하려고 층별 안내를 볼 뿐인데도 경호원이 밀착 감시했다. 이곳에 입주한 다른 기업 관계자에 물으니 파크원은 애당초 보안이 삼엄한 건물이라고 했다. 특정 층으로 가려면 그 층에 입주한 기업의 사원증이 있어야만 한다고 했다.
자택으로 가면 유 사장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뻗치기'라도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원하는 정보를 얻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무식한 방법이지만 결과는 가장 확실하다. 유 사장은 용산구 '나인원한남'을 2021년 5월에 매입했다고 알려졌는데 이곳에는 유명 연예인은 물론 기업인이 다수 거주한다.
그런데 나인원한남은 뻗치기조차 무력화시키는 '요새'였다. 보안은 4중으로 돼 있고 매물을 보러 가기만 해도 신분을 증명해야 한다. 층마다 단독 승강기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다. 커뮤니티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덕분에 단지 밖을 나오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하다. 유석훈 사장이 정문으로 걸어 나가지 않는 한 마주칠 수 없다.
유진그룹과 유 사장이 그토록 노출을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유진그룹 구성원은 철저하게 숨은 경영 후계자를 믿고 자신의 생계를 맡길 수 있을까. 유진기업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사내이사인 그는 올해 1~3월 총 5차례 열린 이사회에 100% 참석했다. 유 사장이 소리 없이 능력 있는 경영인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어째 찝찝함은 3개월 전보다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