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터통신은 지난 7일(현지시간) 미 상무부가 화웨이에 반도체 등을 수출하는 일부 자국 기업의 수출 면허를 취소했다는 보도를 전했다. 마이클 매콜 하원 외교위원장은 "해당 제재가 중국의 첨단 AI 개발을 막기 위한 핵심 조치"라고 전했다.
미국의 화웨이 견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2019년부터 화웨이를 거래 제한 명단(블랙리스트)에 올렸고 화웨이에 반도체를 납품하려면 까다로운 사전 승인 절차를 거치도록 정하기도 했다. 반도체 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 자체를 차단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됐다.
미국 정부의 제재에도 화웨이는 흔들리기는커녕 엔비디아가 '강력한 경쟁자'로 꼽을 정도로 성장하며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자체 인공지능(AI)칩을 개발한 데 이어 최근 AI 학습 소프트웨어까지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화웨이는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대체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AI칩 '어센드'를 개발하고 있다. 어센드910B는 엔비디아 고사양 AI GPU인 H100의 약 80% 성능을 갖췄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어센드는 H100의 하위 버전인 A100과 경쟁이 가능할 정도의 성능"이라고 설명했다.
칩 제작은 중국 파운드리 업체 SMIC가 맡았다. 미국의 규제에서 벗어난 심자외선(DUV) 기술로 초정밀 공정인 7나노미터(㎚·1㎚=10억분의 1m)급 반도체를 제조하고 있다. 자국 시장을 바탕으로 기술력을 높이면서 5㎚의 벽까지 넘어설 걸로 보인다.
화웨이는 칩 뿐만 아니라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에도 나섰다. 호주 언론 이스트아시아포럼은 "발표 시기와 성능은 아직 알 수 없지만 화웨이가 AI 개발을 할 수 있는 독점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9월엔 장핑안 화웨이 클라우드 대표가 '어센드 AI 클라우드 서비스'를 공개하기도 했다. 어센드 AI 여러개를 합쳐 강력한 성능의 클라우드를 만들고 그 위에서 AI를 개발하는 일종의 구독형 플랫폼이다.
화웨이의 전략은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엔비디아의 GPU를 대신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도 AI 개발자를 묶어두겠다는 것이다. 미국 제재에 맞서는 동시에 엔비디아의 GPU와 AI 소프트웨어 플랫폼 '쿠다(CUDA)'에 대항할 독자적인 AI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게 목표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AI 반도체 시장을 보면 하드웨어가 주력인 기업은 소프트웨어 중점 기업과 함께 하려 하고, 구글이나 오픈AI 같은 소프트웨어 기업은 하드웨어가 강점인 삼성 같은 기업과 연합하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며 "화웨이도 세계적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화웨이만 소프트웨어 독립에 나선 건 아니다.
대만의 반도체 관련 전문지인 디지타임즈는 중국의 신흥 GPU 제조사로 엔비디아 부사장 출신 장젠중 최고경영자가 지난 2020년 설립한 무어스레드, 상하이 기반의 바이런테크놀로지가 미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뒤 소프트웨어 생태계 개발에 나섰다고 전했다.
두 회사는 엔비디아 보다 저사양의 GPU를 만들면서 저가 시장 공략에 나섰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엔비디아의 쿠다와 함께 작동할 수 있어 별도의 소프트웨어 프레임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없다는 게 강점으로 작용했다.
쿠다와의 호환성으로 시장 점유에 나섰던 두 회사는 미국의 제재 이후 소프트웨어 개발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는 중국의 이 같은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일단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의 반도체 제조업체들의 공격적인 행보가 당장 국내 업계에 미칠 영향은 적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 교수는 "화웨이 등은 AI 관련해서 다른 기업보다 뛰어나거나 매력적이지는 않아 그 영향력이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라고 말했고 길은선 산업연구원 산업정책연구본부 연구위원은 "중국 내부에서 이미 AI 반도체 설계·제작·활용을 상당히 끌어올린 상태"라며 당장에 미칠 파장은 적다고 분석했다.
우려할 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 인력 유출이다. 업계에서도 화웨이가 당장은 한국 반도체 기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기는 어렵지만, 국내 핵심 인재 이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길 위원은 "중국은 내부 인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언제든 국내 임금의 3~5배를 주고 데려갈 수 있는 곳"이라며 "반도체 인력 이전에도 중국은 조선, 디스플레이 등에서 기술과 함께 인력을 가져갔다"고 중국의 잠재적 위험성을 지적했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경찰은 지난 1월 서울 강남의 헤드헌팅 업체들을 중국으로 반도체 인력을 빼돌린 혐의로 수사했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밝힌 반도체 인력 유출 추산 규모는 약 200여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