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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4차 산업혁명, 기술과 함께 숨쉬는 규제가 살린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범종 기자
2019-09-20 19:58:17

네거티브·포지티브 한쪽만으로는 불확실성 대응 못해

'규제 샌드박스' 규제 우회 악용 막을 장치 필요

정부 권한 넓어지는 규제 해석, 민간 목소리 반영해야

박균성 한국법학교수회장이 20일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열린 '4차산업혁명 시대 규제입법의 대응과 과제'에서 기조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신기술 파급력에 대응한 규제입법은 네거티브 일변도를 벗어나 민간 참여 등 유연성이 반영돼야 한다는 조언이 나왔다. 정부의 역량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면서 이해 관계자들의 목소리가 규제 적용과 평가에 지속적으로 반영돼야 한다는 의미다.

박균성 한국법학교수회 회장(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일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 시대 규제입법의 대응과 과제’ 학술대회에서 네거티브 규제 일변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 규제입법의 나아가야 할 방향’ 기조강연에서 신기술・신산업에 금지 목록을 정하고 나머지를 허용하는 대신 안전성을 전제로 선허용-후규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전은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 먼저
앞서 정부는 2017년 10월 ‘신산업분야 네거티브 규제 발굴 가이드라인’을 제정했다. 이후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한 규제혁신 과제로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 실현을 내세우고 있다.

박 회장은 네거티브 리스트 규제 입법이 신기술과 신산업 도입에 유용한 반면, 국민의 생명과 신체 안전이나 환경에 중대한 영향을 줄 우려가 있을 때는 포지티브(허용 외 나머지 금지) 규제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규제 없는 상태에서 공익이 훼손된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네거티브 규제의 대표적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가상화폐 역시 규제 없이 유통돼 투기와 사기 문제를 야기해왔다.

사업자 입장에서도 네거티브 규제는 결코 유리하지 않다. 사업이 우선 허용된 이후 공익을 위한 규제가 늘어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 피규제자가 피해를 입는다. 사후규제 가능성을 남기는 네거티브 규제는 사업에 불확실성을 남긴다는 지적이다. 네거티브를 넓게 해석할수록 금지 사업이 늘어나기도 한다.

포지티브 규제 역시 법률 없이 신사업이 불가능한 맹점이 있다. 인터넷방송(IPTV)를 허용하는 법이 없어 기술을 갖고도 수년간 시행되지 않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선허용된 신산업은 공익 훼손이 없을 경우 정식 허용하고 사후 규제 역시 합리적이라는 신뢰가 쌓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선 위해성 평가제도를 도입해 자율 평가 적정성을 행정기관이 판단하고, 안전에 중대한 영향이 우려되면 공신력 있는 기관이 위해성 평가를 하는 식이다. 그는 각 행정분야의 안전평가원과 협력하는 ‘복합안전평가원(가칭)’ 창설을 제안했다.

입법지체에 따른 법적 장애 극복은 규제 샌드박스 활용에 달렸다. 임시 허가 후 정식허가가 지체되지 않도록 안전 문제가 없으면 정식 허가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럴 경우 차량공유 서비스에 대한 택시 업계 반발로 정식 서비스가 어려워지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밑바탕에는 안전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깔려야 한다. 신기술・신산업 허용과 규제 정도, 여러 단계에 걸친 안전성 정도를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두려움 완화와 신산업의 투명화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행정적 해석과 권한이 넓어지는 4차산업혁명기에는 공무원의 전문성 확보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박 회장은 “현재 공무원 채용제도와 순환보직제, 교양 위주 재교육제도 등으로 인해 공무원의 법적 전문성과 기술전문성이 크게 미흡하다”며 국가는 새로운 대학 전공 개설과 공무원 채용시험, 교육 등으로 법・정책・기술융합전문가 양성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승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진=이범종 기자]

◆부족한 행정 전문성, 민간이 메워야
최승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민관 협력으로 규제개선 순환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4차산업혁명 시대 규제입법 패러다임 전환의 모색’ 발표에서 규제를 양적으로 접근해온 관행을 깨고 질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역대 정부가 해온 양적 규제 줄이기는 기존에 연결된 규제에 영향을 줘 ‘규제 요요현상’을 부를 수 있다고 봤다. 규제 숫자를 줄인다 한들 ‘수리를 요하는 신고제’로 전환돼 규제 부담은 크게 줄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위험에 대한 정보가 불명확한 점도 규제에 대한 관점 변화를 요구한다. 3차 산업혁명까지는 현존하는 위험이 규제 대상이었다. 하지만 기술 융합은 위험에 대한 정보가 불충분하다. 위험이 불명확할 때 국가는 과도한 규제를 택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방식이 유럽연합의 ‘더 나은 법령(Better Regulation)’이다. 규제 형성에 이해관계자가 참여하고 규제 이후 평가 결과를 규제 개선에 반영하는 순환고리다. 이 속도가 빠를수록 제도 개선도 순발력을 높일 수 있다.

규제 샌드박스가 취지와 달리 기존 규제의 우회로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규제 대상이 기존에 없던 혁신적 기술・서비스인지 따져야 한다. 기술의 편익 증진 가능성과 소비자 보호장치 설정도 고려해야 한다. 샌드박스 취지를 살리기 위해 신속한 분쟁해결절차도 필요하다. 호주는 규제 샌드박스 내 서비스 이용시 금융회사는 반드시 호주증권투자위원회(ASIC)가 관할하는 분쟁조정제도(ADR)에 가입하고 소비자 보상제도를 공시해야 한다.

기술 발전으로 공익과 사익 간 크기 측정은 물론 개인정보와 소비자 보호 문제도 복잡해졌다. 최 교수는 데이터 활용이 부가가치 창출의 조건이 된 만큼 비식별화를 통한 정보시스템 무결성 검토가 필요하다고 봤다.

행정청의 규제 해석 재량이 넓어지는만큼 행정입법 통제에 민간이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국가가 가진 정보와 전문성에 한계가 있고 규제의 불명확성도 높아지고 있어서다. 독일은 사이버 보안법 제정 과정에서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해 업계가 수용 가능하면서도 전문화된 법을 제정했다는 설명이다.

규제 개선 논의의 근본적인 조건은 규제 당국과 피규제자 모두의 솔직함이다. 피규제자는 산업 진입과 행위 관련 위험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 규제자는 규제의 과도함을 알면서도 문제 발생시 비난 가능성과 정치적 성과 달성을 위해 계획경제식 규제완화에 돌입한다는 지적이다. 최 교수는 “좋은 규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해 당사자들이 모든 정보와 자료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시작이 필요하다”며 “규제법제는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이 충분히 논의되고 반영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도출된 안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창근 법률사무소 현명 변호사. [사진=이범종 기자]

◆규제 사각지대 없애고 책임 강화해야
김창근 법률사무소 현명 변호사도 정부 규제가 기존의 명령형, 사전적 규제를 벗어나 달성 목표를 제시하는 목표(성과)지향적 규제, 사후적 규제로 전환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부분의 정부규제가 행정부담과 엄격성, 불확실성, 시의성, 유연성 등을 충족시키지 못해 규제 사각지대가 발생한다는 지적이다.

선진국들은 규제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민관 협력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민간 인터넷 기업들이 정보통신기술과 제조업을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정부는 선진 제조기술을 이용한 제조업 활성화와 혁신을 내건 ‘첨단제조파트너십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정부와 민간이 연계한 ‘제조혁신 국가네트워크’ 구축을 추진했다. 미국 5개 민간기업 GE, AT&T, 시스코, IBM, 인텔이 2014년 세운 산업인터넷 컨소시엄(IIC)에는 2016년 기준 30개 국가 250개 기관이 참여중이다.

독일도 민관 협력을 강조한다. 독일은 저비용 대량생산으로 추격하는 중국・인도에 대응하기 위해 스마트 공장 구축이 핵심인 ‘인더스트리 4.0’ 전략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표준화 지연과 중소기업 참여 부재 등을 극복하기 위해 기업인과 전문가, 노동자 등이 모여 정책을 수립하는 ‘플랫폼 인더스트리 4.0’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신기술을 우선적으로 도전하는 ‘트라이 퍼스트(Try First)’를 장려하고 시장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규제 담당국이 일정 기간 기업 기술실증실험을 지원한다. 최근에는 국가전략특구법을 개정해 특구지역에서 자율주행자동차, 드론 같은 신기술기반 서비스를 실증 실험할 경우 규제를 적용 하지 않는 규제샌드박스식 규제 프리존을 구축했다.

김 변호사는 장기적으로 개별법을 정비하고 단기적으로는 혁신 기술・서비스 출시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문제 발생 시 인허가 취소, 행정제재, 특례철회, 시범사업 중단, 손해배상제도 등 사후규제 책임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세정 한국법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사진=이범종 기자]

◆유연하지만 확실한 규제입법이 과제
이세정 한국법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규제 입법 재평가에도 계획이 포함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술 변화에 맞춰 규제속도를 유지하려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정책 평가가 필요하다. 다만 주기적인 규제 재평가와 수정은 규칙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저해해 투자와 혁신 좌절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이 연구위원은 “규제입법에서의 유연성 역시 계획되어야 한다”며 “규제 입법 초기에 조기 재평가 내지 잠재적 수정에 관한 사전 약속을 통해 변화하는 과학기술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들에 잘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 이충윤 변호사는 토론에서 짧은 규제 샌드박스 기간 때문에 사업자가 해외로 눈 돌리는 문제를 제기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 허가 기간은 최대 4년이다. 이 변호사는 ▲소관 부처별로 각 규제 법안이 검토・협의되지 않는 상황에서 규제가 늘어나고 ▲다른 부처 소관 법률을 검토하지 않는 문제 ▲자율차 사고처럼 융합기술에 따른 책임 소재 명확성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이번 대회는 대한변호사협회와 한국국가법학회, 한국법제연구원이 공동 주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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