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핵심 요소인 팔라듐과 네온 수급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는 만큼 우크라이나 사태의 지정학적 위기가 장기화할수록 반도체 공급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두 재료의 주 생산지로 꼽히는 탓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전 세계에 유통되는 팔라듐 중 약 44%를 공급하고 있다. 러시아가 수출하는 원자재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 우크라이나가 전 세계에 공급하는 네온은 70%에 달한다. 네온은 전체 수요 중 70%가 반도체 업계에서 활용될 정도로 필수 재료로 통한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로 팔라듐과 네온의 수출에 제동이 걸리면 반도체 공급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14~2015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를 병합할 당시 네온 가격이 몇 배 이상 치솟으면서 반도체 업계에 타격을 줬었다. 팔라듐의 경우 올해 초 트로이온스(1트로이온스는 약 31.1034그램)당 2300~2400달러 수준이었지만 지난 8일 오후에는 3000달러를 밑돌았다.
반도체 수급난이 내년 3월까지 장기화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블룸버그통신, 비즈니스스탠다드 등 외신에 따르면 일본 도시바의 디바이스 앤 스토리지 부문 책임자인 히로유키 사토는 "반도체 공급이 내년 3월까지 계속해서 제약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자재 가격 인상에 따른 반도체 가격 인상 가능성도 내다봤다.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러시아는 국제 사회에서 다양한 경제 제재를 받고 있다. 러시아 루블화 하락 등의 이유를 들어 애플과 닌텐도 같은 전자제품 업체부터 맥도날드 등 식품 기업까지 러시아 시장에서 발을 빼고 있다.
일본 중공업회사 코마츠와 히타치건설 등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 회사는 러시아에 광산 기계와 굴삭기 등을 당분간 공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원자재 채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빠르면 올해 하반기부터 반도체 공급이 수월해질 것으로 예상했던 완성차 업계의 고민도 높아지고 있다. 현대차·기아의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22.7%로, 르노-닛산에 이어 시장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현대차를 비롯해 현대제철, 현대건설 등 계열사를 통해 러시아에 보유하고 있는 법인이 18곳에 이르고 있어 지정학적 리스크 자체가 생산 중단 등 차질을 줄 수 있다.
무디스는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자동차 제조업체, 전자제품 기업 등의 반도체 의존도가 더 높아지고 있다"라며 "향후 몇 개월 동안 대안을 찾지 못하면 해당 사업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업계 관계자는 "통상 얼마간의 물량을 미리 비축해두는 만큼 당장은 큰 타격이 없을 것으로 본다"라며 "다만 장기적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주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