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악화에도 R&D 지출은 상승세…"미래 선제 대응"
11일 본지가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석유화학·조선·항공·자동차 등 7개 업종 주요 기업 22곳의 올해 상반기(1~6월)와 최근 3년(2020~2022년) R&D 투자액을 분석한 결과 기업 투자는 최근 실적 부진과 관계없이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기업에서는 매출이 하락할 때 반대로 R&D 투자를 늘리는 역(逆)의 상관관계가 관찰됐다.
업종별로 살펴보면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디스플레이 업계가 R&D 지출액 상위권에 포진됐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계는 업황 악화에 따른 실적 부진에도 R&D 비용을 전년 대비 꾸준히 늘렸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석유화학 업계도 마찬가지다. 석유화학 4사(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금호석유화학)는 모두 연구개발비를 늘리는 추세다. 특히 신사업 확대에 한창인 LG화학과 한화솔루션은 각각 지난해에 연구개발에 9015억원, 1978억원을 지출했다. 이는 7341억원, 1398억원을 쓴 2021년 대비 대폭 증액한 금액이다.
매출 상위 기업들은 대체로 활발한 R&D 투자를 진행했다. 삼성전자는 22개 기업 중 해당 기간(2020년 1월~2023년 6월) 매출액과 연구개발비 순위 모두 1위에 이름을 올렸다. 현대자동차는 매출액 2위, 연구개발비 3위를 기록했으며 현대모비스는 매출액 3위, 연구개발비 6위를 달성했다.
22개 기업 중 두 번째로 연구개발에 비용을 많이 지출한 기업은 SK하이닉스였다. SK하이닉스 매출 순위는 8위에 머물렀지만 연구개발비 면에서는 삼성전자의 뒤를 바로 이었다.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율로는 3위 삼성전자와 2위 LG디스플레이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철강·조선 업계는 비교적 연구개발 비율이 낮은 업종으로 꼽혔다. 포스코는 22개 기업 중 유일하게 3년간 연구개발 비용 측면에서 뚜렷한 내림세를 보였다. 2020년 연구개발비로 6145억원을 지출했던 포스코는 2023년 상반기 1928억원에 불과한 비용을 연구개발에 사용했다. 매출액과 관계없이 전체 기업 중 KG스틸의 연구개발 비용은 가장 적었다. KG스틸의 연구개발 비율은 2020년 0.08%에서 지난해 말 기준 0.05%까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산업 트렌드'…변화 좇는 기업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에 따라 산업 패러다임 변화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에 발맞춰 기업간 거래(B2B)를 주력 사업으로 뒀던 기업이 기업간 소비자 거래(B2C) 사업에 뛰어드는가 하면 AI를 활용해 자동화에 힘쓰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다.
신기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전 세계 관심도도 높아지면서 국내 기업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짧아진 기술 혁신 주기 탓에 선행 연구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되는 상황이다.
일례로 지난해 11월 오픈AI가 공개한 생성형 AI 챗GPT는 출시 이후 단 5일 만에 이용자 100만명을 모으며 정보기술(IT) 업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약 10개월이 지난 현재 생성형 AI는 이미 산업 전반에, 특히 반도체 업계에 스며든 상태다.
생성형 AI는 텍스트, 이미지, 소리 등 기존에 쌓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인공지능 모델을 말한다. 무수한 데이터의 패턴을 학습하고 또 새로운 데이터를 생성해야 하기 때문에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연산을 처리해야 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생성형 AI의 특성은 반도체 업계에 한차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지난해부터 장기화된 글로벌 경기 침체로 모바일, 개인용 컴퓨터(PC) 등 IT 수요 약세가 이어지자 주요 부품인 메모리 반도체 재고 소진 속도가 예상보다 더디게 나타났다.
그런데 최근 반도체 업황 부진 속에서도 메모리 반도체는 AI시대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등극했다. 1년 사이 생성형 AI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기존 D램이 아닌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같은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가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연구개발 지출액에서 각각 1·2위를 달성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반도체 공정은 갈수록 미세화되는 와중에 선단공정에서 빠르게 수율 개선을 이뤄내려면 높은 개발 난이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韓 둘러싼 복잡한 국제 정세…글로벌 '복합 위기'까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 심화 등 급변한 국제 정세는 우리 기업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러-우 전쟁은 발발한지 장장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장기화된 전쟁 탓에 러시아에 진출해 있던 국내 기업들은 사실상 철수했다. 공급망 차질이 빚어지면서 원자재값·물류비·국제 유가 상승으로 이어졌고 철강·석유화학 업계에는 사상 최대 타격을 입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對) 중국 무역 전쟁은 양국간 기술 패권전쟁으로 이어졌다.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국가 안보와 공급망 안정화 등을 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탈(脫) 중국' 추세에 편승하는 전략을 구상하는 중이다.
미국과 중국을 양축으로 신냉전 체제가 본격화하면서 배터리, 자동차 산업도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특히 미·중 패권전쟁의 최대 산물인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올 한 해 온 세상을 들썩이게 했다. IRA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서 추출·가공된 배터리 핵심 광물을 사용해야만 한다. 중국산 소재에 대한 배제가 핵심이다.
IRA 시행 이후 북미에 공격 투자를 단행한 국내 배터리·자동차 기업들은 IRA에 따른 세액공제 덕분에 많은 수혜를 받았지만 그 효과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여전히 한국은 대중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데다 가격 경쟁력을 갖춘 중국 기업들도 IRA 우회로 마련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내부에서는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조철 한국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국이 당장 한국에 직접적으로 무역 장벽을 세우거나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지는 않아도 중국 내에서 한국에 대해 (중국과) '적대적 관계'라는 인식이 강해 앞으로는 한국에서 수입했던 품목들을 계속해서 국산화하려는 노력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 부동산 리스크와 미국 국채 금리 상승 등 대외 통화정책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 이른바 3고(高) 현상이 1년여간 지속하자 산업계에서는 신규 투자나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돈맥경화'를 우려한다.
◆30년 만 첫 R&D 예산 감축…기초 연구·인재 발굴 우려도
여러 난관이 겹친 가운데서도 기업이 R&D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정부는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다. 정부는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2024년 국가 R&D 예산에 25조9000억원을 편성했다. 올해 편성된 31조1000억원보다 16.6% 삭감됐다. 심지어 분야별 재원 배분 계획 중 예산 감소 폭이 가장 컸다.
정부 R&D 예산 삭감은 60년 만에 처음이다. 지난 4월 150조원 이상의 민간 R&D가 투자되도록 R&D 세액공제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한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 행보다. 국가 R&D 효율화를 위해 기업 보조금 성격의 나눠주기 사업, 성과 부진 사업 등과 같은 누적된 비효율을 걷어내기 위해서라지만 업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예산을 편성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는 불안정한 국가 경제와 안보를 위해서 '선택과 집중'을 하는 전략적 예산 분배를 했다고 밝혔다. 반도체·배터리·우주 등 국가 전략 기술에 대한 투자액은 기존 4조7000억원보다 6.3% 증가한 5조원으로 확대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이번 예산 편성에 대한 거센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한 산업계 관계자는 "장기간 걸쳐 서서히 빛을 보는 산업군도 있고 여러 지정학적 리스크로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지 못한 산업군도 많은데 현재 잘 나가는 업종만 지원해주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글로벌 기술 경쟁이 불붙은 상황에서 R&D 예산 삭감으로 기초 연구와 인력 양성에 소홀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 내년 기초연구 예산은 2023년 2조6000억원 대비 6.2% 감소한 2조4000억원, 출연연 예산도 올해 2조4000억원보다 3000억원(10.8%) 줄어든 2조1000억원이다. 일부 기관의 나랏돈을 눈 먼 돈으로 보는 듯한 관행도 바로 잡아야겠지만 기업 R&D 자금·인력이 미국이나 유럽 등지로 유출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서 생명과학 연구를 담당하는 A 교수는 "뿌려주기식 R&D 사업을 대폭 줄이겠다는 목적 자체는 공감하나 오히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첨단 기술에 예산·인재 쏠림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 같다"며 "지금도 만성적인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걱정"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