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에 따른 국내로의 직격탄은 없어도 전 세계적으로 커지는 유동성 공포감은 새로운 금융위기의 전조 현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른바 '뱅크데믹(은행과 팬데믹을 합친 말)'을 겨냥한 경고성 메시지가 잇따른다.
SVB 사태와 크레딧스위스(CS) 위기 등 동시다발적 글로벌 금융 이슈가 반복될 경우 국내로 전이될 가능성도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진단에서다. 이런 위기감 속에 금융권 뇌관으로 꼽히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가리켜 금융 전문가들은 시한폭탄이 터질 시기가 임박했다고 입을 모은다.
5일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한 이혁준 나이스신용평가 금융평가본부장은 SVB 사태가 예수금을 미국 국채를 사는 데 사용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상황과 다소 다르다면서도 "해외 소식이 국내 은행에 대한 막연한 걱정을 키워 은행주 하락에 영향을 끼쳤다"고 운을 뗐다.
그는 우리나라 은행의 경우 예수금으로 대출금을 운영하는 데다 예금·대출 각각 만기가 어느 정도 유사하게 유지된다는 점을 전제했다. SVB·CS 사태가 우리나라에 미치는 파장이 우려했던 것에 비해 크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본부장은 가장 안전한 금융업종인 은행에서 이런 노이즈가 발생했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또 다른 금융위기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강조했다.
이 본부장에 따르면 본래 은행업은 핵심 공공재 성격을 지닌 산업으로, 위기 시 국가가 모든 자원을 가용해 은행 붕괴를 막는다. 그렇다고 은행의 부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전 세계 금융역사를 살펴보면 은행이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한 사례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한 은행이 무너지면 촘촘히 연계된 국가 간 지급결제망이 타격을 입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 은행에도 부실이 전이될 수 있다"고 전한 이 본부장은 은행 부도를 사전에 방지하는 일은 국가 차원을 넘어 세계적 공조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제결제은행(BIS·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을 대표적 예로 들었다. BIS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바이마르 공화국 배상 문제를 의논하고자 1930년 6개국 중앙은행이 스위스 바젤에 모인 것이 그 모태인데, 국제 금융안정을 증진하는 기구로 발전했다.
BIS는 독일 헤르슈타트 은행(HB·Herstatt Bankhaus) 파산 사건에서 제 역할을 여실히 증명했다. 1974년 HB 사태로 국가 간 지급결제망에 막대한 혼란이 발생하자 BIS는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Basel Committee on Banking Supervision)를 산하위원회로 설치했다.
이는 은행 파산 사태에 대한 체계적 대응방안 필요성이 빚은 결과였다. 이 본부장은 "이후 BCBS는 1988년 국제적 차원의 첫 은행 자기자본 규제제도인 '바젤 협약'을 발표했다"며 "이 협약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보다 정교화돼 2004년 '바젤 Ⅱ', 2010년 '바젤 Ⅲ'가 발표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상존할 금융권 최대 문제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을 꼽았다. 미분양 물량이 계속 쌓이는 상황에서 투자금 회수도 잘 안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이유에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새마을금고의 부실 PF 논란이 점화되면서 본격 경고등이 들어왔다는 반응이 커지고 있다. 금융권은 검찰의 새마을금고 PF 불법 대출 혐의에 관한 수사 결과에 주목한다.
새마을금고 측은 "부동산 시장 불황 때문에 연체율이 증가하고 있지만 충분히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며 "고객 예적금을 언제든지 지급할 수 있게끔 작년 말 기준 상환준비금 12조4409억원을 적립 중이며 자체 적립금도 7조2566억원을 보유 중"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새마을금고가 금융당국, 즉 금융감독원 관할 밖이라는 점을 지목한다. 다만 새마을금고는 국가에서 제정한 새마을금고법에 의거해 시중은행보다 앞선 1983년부터 예금자보호를 실시해 오고 있다.
강승건 KB증권 기업분석부 이사는 부동산 PF 위기를 '시한폭탄'이라고 경고했다. 강 이사는 "지난해부터 PF 위기론이 심각하게 불거짐에 따라 유동성 제공·만기 연장 등 금융당국이 그에 따른 정책적 의사결정을 내린 건 합리적"이라고 평했다.
앞서 한국은행은 작년 9월 말 기준 우리나라 전체 부동산금융 익스포저(위험노출액)가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125.9% 수준으로, 익스포저가 나라 경제 규모를 웃돌았다고 풀이했다.
홍경식 한은 통화정책국장은 지난달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부동산 PF 위기 해법 모색 세미나'에서 "자산규모가 큰 은행권은 우려스럽지 않으나 부동산 PF 익스포저가 큰 비은행 금융기관은 부동산 시장 부진이 악화할수록 자본적정성과 유동성이 저하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PF 위기가 가시화할 경우 제2금융권이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강 이사는 "현재 거론되는 PF 건들이 모두 정상화돼 분양에 성공하는 해피엔딩은 어렵지 않겠냐"며 올해 말에서 내년 초 사이 본격적인 부실 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아울러 "중·후순위 익스포저가 큰 금융사의 경우 대손충당금 부담률이 늘어날 것"이라면서 "그런 금융기관이 예금기관이라면 뱅크런에 대한 우려도 커질 수밖에 없다"고 부연했다.
강철구 한국기업평가 금융본부장은 최근 유동성 위험이 발생한 방식, 이른바 '디지털화 뱅크런'에 주목했다. 디지털 기술 발달로 금융거래가 쉬워져 뱅크런이 가속화한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을 자부하는 우리나라에서도 평판 리스크에 따라 돈이 급속도로 빠져나갈 시스템 유사성이 높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