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단위로 탄다는 의미인 '패밀리카'는 1인 가구 증가와 혼인·출산율 감소 속에서도 여전히 자동차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만큼 완성차 제조사들이 신경을 쓰는 영역이면서 경쟁도 치열하다. 중형 또는 대형 SUV는 뛰어난 공간 활용성을 무기로 많이 팔리는 차종으로 등극했다.
지난 10일부터 3일간 서울과 수도권 약 380㎞를 타본 혼다 파일럿은 패밀리카로서 면모를 잘 갖춘 차였다. 승차정원 8인승이 주는 넉넉함과 좌석 형태를 용도에 맞게 바꿀 수 있는 자유도까지 공간에 힘을 줬다. 파일럿은 탑승객이 타는 내내 주택의 거실을 축소해 옮겨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세대가 바뀐 완전변경 모델답게 이전 세대와 비교하면 확실히 커졌다. 전폭(너비)은 1995㎜로 같지만 전장(길이)이 5005㎜에서 5090㎜로 85㎜나 길어졌다. 휠베이스(축거)는 2890㎜로 70㎜ 늘어났고 전고(높이) 역시 1805㎜로 10㎜ 높아졌다. 덩치를 확 키우면서 탑승 가능한 최대 인원도 7명에서 8명으로 증가했다.
혼다가 국내 소비자에게 강조하는 점도 공간이다. 좌석은 1열부터 3열까지 2+3+3 구조로 자유로운 배치가 가능한데 이는 커진 차체와 시너지를 낸다. 4~5명이 타면서 짐을 많이 실어야 할 땐 3열 좌석을 접어 1373리터(ℓ)로 넉넉한 적재 용량을 확보할 수 있다. 2열 가운데 좌석을 분리해 트렁크 바닥에 숨겨진 수납함에 보관하면 독립 시트를 갖춘 7인승으로 쓸 수 있다.
전고가 높아진 덕분에 3열 탑승객도 충분히 허리를 펴고 앉을 수 있었다. 중형 SUV의 3열은 구색 맞추기에 가깝지만 파일럿 같은 대형급으로 넘어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키가 180㎝, 체중 70~80㎏인 사람이 앉아도 앞뒤나 위아래가 낀다는 불편함이 없었다. 물론 3명이 꽉 채워서 앉기보단 2명이 여유롭게 앉는 게 나았다.
실내는 혼다 특유의 실용성 중심 배치와 디자인이 특징이다. 전반적으로 무난했지만 도어 트림(내장)이나 대시보드에 가죽과 유광 소재를 적절히 가미해 고급감을 줬다. 각종 장치와 버튼은 직관적이고 조작이 편하게 만들어졌다.
파일럿의 가장 큰 장점인 공간 활용성은 사소한 곳에서도 잘 드러났다. 앞좌석부터 맨 뒷좌석까지 곳곳에 수납함이 마련됐다. 앞좌석 센터페시아(운전석과 동승석 사이 패널)엔 스마트폰 무선충전기와 별개로 전화기를 하나 더 넣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동승석 쪽 대시보드에는 선반 형태로 공간을 만들어 지갑이나 휴지 같은 작은 소품을 놓기 좋았다.
앞좌석 도어를 비롯해 2·3열까지 벤티(Venti) 용량 테이크아웃 잔을 넣을 수 있는 컵홀더가 아낌없이 들어간 점도 돋보였다. 파일럿의 컵홀더 개수는 무려 14개다.
디지털 계기판과 인포테인먼트 화면은 다른 혼다 차량과 마찬가지로 세련미보다는 기능에 초점을 맞췄다. 혼다 순정 내비게이션은 빠졌다. 유선으로 스마트폰을 연결해 안드로이드 오토나 애플 카플레이를 쓰면 돼 문제는 없었다. 아쉬움이 있다면 차 크기에 비해 10.2인치 화면은 작다.
탑승객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인 승차감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과속방지턱을 뒤늦게 발견해도 뒤에 탄 사람에게 미안하지 않을 정도다. 요철을 지날 때 위아래로 크게 움직일 때 '물침대 같다'고 하는데 파일럿이 딱 그렇다. 2열과 3열에 앉은 동승자의 표현을 빌리면 고속버스를 탄 느낌이라고 했다.
소음이 잘 억제된 점도 이 차의 강점이다. 고급차가 아닌 일반 양산형 차량에서는 보기 드물게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ANC)이 들어갔다. ANC는 소음을 실시간으로 감지해 반대 주파수를 발생시켜 이를 상쇄하는 기능이다. 실제 80~100㎞/h로 달릴 때 귀로 전달되는 소음은 매우 작았다.
연비는 사륜구동인 점과 엔진 배기량, 차량 무게 등을 고려하면 나쁜 편은 아니다. 시승 차량을 반납하기 직전 계기반에 표시된 연비는 9.7㎞/ℓ였다. 주행 비중은 자동차 전용도로 약 40%, 왕복 2차로 도로 30%, 시내 주행 30% 정도였다.
가격은 6940만원으로 이전보다 900만원가량 올랐다. 선뜻 지갑을 열기에 부담스럽지만 비슷한 가격대에서, 수입차를 놓고 봤을 때 8인승 대형 SUV를 생각하면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SUV 경쟁이 나날이 치열해지는 국내 시장에서 파일럿이 성공할지 지켜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