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고환율 '리스크' 안은 항공·석유화학
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 충돌은 3고에 고유가를 더해 '4고'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국제유가는 두바이유 기준 올해 초 배럴당 70달러선에서 출발했다가 중동 정세 불안이 커지며 지난주에는 90달러를 돌파했다. 국책연구기관인 에너지경제연구원(에경연)은 이란이 원유 수출을 중단하고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 유가가 배럴당 210달러까지 뛸 수 있다고 봤다.
이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당장 실현 가능성은 낮다. 수출의 절반 이상을 원유에 의존하는 이란이 스스로 수출길을 막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유다.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서 주로 석유를 수입하기 때문에 국내 원유 공급에는 큰 차질이 없을 전망이다. 다만 중동발 원유 수송량의 20%를 담당하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변수다.
지금처럼 고유가가 지속하면 석유 소비가 많은 업종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항공업이 대표적이다. 항공사 영업비용 중 유류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30% 내외로 국제유가 상승은 수익성에 치명적이다. 지난해 대한항공 사업보고서를 보면 국제유가가 배럴당 1달러 오르면 영업이익이 3100만 달러(약 430억원)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유럽과 미주 노선으로 영역을 넓히는 저비용 항공사(LCC)에는 고유가·고환율이 더욱 부담스럽다. 한 LCC 관계자는 "기름을 많이 쓰는 장거리 노선이거나 대형 항공기일수록 부담이 크다"며 "장거리 취항에 적극적인 몇몇 항공사는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업계도 수익 감소를 걱정하고 있다.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유가 상승이 호재로 여겨지지만 제품 수요가 저조한 지금은 악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 등 주요 석유화학 업체는 지난해 중국발 공급 과잉과 플라스틱 수요 위축으로 1년 내내 실적 한파에 시달렸다.
석유화학사 관계자는 "기름값이 오르면 화학 제품 원료인 납사 가격도 덩달아 뛰는데 수요가 충분히 많을 땐 판매 가격을 높여 스프레드(원가와 판매가 차이)를 확보할 수 있다"면서 "지금처럼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면 마진을 적게 남길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국제유가 상승 영향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상존한다. 발전 단가가 올라 산업용 전기요금이 조정될 수 있어서다. 허윤자 에너지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유가가 가스 가격에 영향을 주고 가스는 전력 도매시장 단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며 "환율 상승도 에너지 도입 가격을 높이기 때문에 전기요금이 오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제유가와 환율이 상승하면서 표정관리에 들어간 기업도 있다. 정유업계는 최근 정제마진이 오르며 실적 개선을 내심 기대하는 모습이다. 정제마진은 휘발유·납사 등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과 각종 비용을 제외한 수익 지표다. 국내 정유사가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 가격은 지난해 평균 배럴당 82.10달러였으나, 올해 들어서는 현재까지 평균 84.18달러를 기록 중이다. 4월 1~20일 기준으로 보면 평균 89.56달러로 90달러에 근접했다.
정유사가 미리 확보한 원유 재고의 장부상 가격(재고평가이익)이 오르는 효과도 기대된다. 재고평가이익은 실제로 현금이 회사로 들어오진 않지만 재고자산이 늘어 영업이익이 개선된 것처럼 비춰진다. 따라서 정유업계는 유가 상승이 실적 개선으로 이어지려면 수요가 받쳐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유사 관계자는 "고유가로 사람들이 이동과 소비를 줄이면 석유제품 수요가 줄어 악재일 수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수출 산업인 자동차 업종은 몸값이 오른 달러 덕을 톡톡히 볼 것으로 예상된다. 환율이 오르면, 다시 말해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똑같은 차를 팔아도 원화로 표시한 매출이 증가한다. 국내 공장에서 차를 제작해 미국에 팔 땐 달러로 표시한 가격이 저렴해지는 효과를 낸다.
실제 현대자동차·기아가 지난해 사상 최고 영업이익을 기록한 데에는 환율이 작지 않은 도움을 줬다. 전년(2022년) 대비 현대차 영업이익 증가폭(5조3020억원) 중 6580억원은 환율 상승에 따른 몫이었다. 기아도 같은 기간 영업이익이 4조3750억원 늘었는데 이 중 5470억원이 환율 효과로 증가한 금액이었다.
본격적인 반등 국면에 접어든 반도체는 '4고'로부터 자유로운 편이다. 인공지능(AI) 구동을 위한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인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중심으로 수요가 견조한 흐름을 보일 것으로 예측됐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는 공개 시장에서 수요자에 의해 가격이 결정돼 수요·공급이 제일 중요하고 환율은 실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한국과 미국에 대대적인 설비 투자를 예고한 만큼 높은 물가와 금리는 부담일 수 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반도체 회사가) 장비를 구입하거나 재료를 구입할 땐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도 "제품을 판매할 때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어 (결과를)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국내 반도체 사업장에선 전기요금이 변수다. 정부는 당장은 전기요금 인상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허윤자 에경원 부연구위원은 "반도체처럼 전력을 많이 쓰는 기업은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