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코노믹데일리] 두 차례의 유찰로 표류하던 '국가AI컴퓨팅센터' 구축 사업이 배경훈 신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취임과 함께 재점화되고 있다. 정부는 민간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사업 구조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한편 업계에서는 이번 기회에 외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AI 인프라의 '기술 주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배경훈 장관은 지난 17일 취임사에서 "AI 고속도로 구축을 위해 국가AI컴퓨팅센터 등 세계 수준의 AI 인프라를 조속히 확충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민간의 참여를 막았던 지분율 제한, 공공기관 지정 가능성 등 '독소 조항'의 완화 필요성을 언급하며 사업 재추진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과기정통부는 최근 클라우드 기업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기존 SPC(특수목적법인) 방식의 규제를 완화하거나 정부가 GPU를 직접 구매해 운영을 위탁하는 새로운 방안을 두고 고심 중이다.
사업 재추진이 가시화되면서 논의의 초점은 단순한 사업 모델을 넘어 '무엇을 구매할 것인가'로 확장되고 있다. 최대 2조 원이 투입될 이 사업의 핵심은 엔비디아로 대표되는 GPU 구매지만 이 GPU를 꽂아 구동할 'AI 서버'와 더 나아가 GPU 자체의 국산화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현재 국내 서버 시장은 델, HP 등 외산이 장악하고 있어 국산 기술 기반 업체들은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운 실정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AI의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다. 국내에서는 리벨리온, 사피온, 퓨리오사AI 등 AI 반도체 팹리스(설계 전문 기업)들이 엔비디아의 GPU에 대항할 NPU(신경망처리장치)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들은 이미 유의미한 성과를 내며 글로벌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정작 국내의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에서는 제대로 된 테스트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국가AI컴퓨팅센터가 이들 국산 AI 반도체의 성능을 검증하고 시장을 열어주는 핵심적인 '테스트베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한 IT 전문가는 "AI 생태계는 GPU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버, 소프트웨어 등 다양한 산업군으로 이뤄지는 풀스택"이라며 "국가적 사업이라면 국내 기술 기업을 배려하고 함께 성장하는 상생의 계획을 짜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같은 우려는 하정우 대통령실 AI미래기획수석에게도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현실적인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업이 이미 두 번이나 무산된 상황에서 '국산 서버·GPU 일정 비율 사용' 같은 조건이 추가되면 사업 추진 자체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다. 또한 당장의 성능과 안정성 그리고 엔비디아의 '쿠다(CUDA)'와 같은 강력한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고려하면 검증된 외산 제품을 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결국 배경훈 장관과 과기정통부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단기적인 효율성과 속도를 위해 검증된 외산 기술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인 'AI 기술 주권' 확보를 위해 국내 생태계 육성에 나설 것인가. 국가AI컴퓨팅센터의 향방은 대한민국 AI 산업의 미래 전략을 가늠할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