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과 시공사의 공사비 갈등으로 재개발·재건축 공사가 중단되는 사업장이 속출하고 있다. 최근 2~3년간 치솟은 건설공사비를 누가 부담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건설업계의 요청에도 묵묵부답이었던 정부는 결국 공사비 상승이 불가피한 현실을 인정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실효성에 한계가 있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 청천2구역·부산 범천 1-1구역 등 공사비 갈등 고조
DL이앤씨는 최근 준공한 청천2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 조합과 신탁사를 상대로 ‘공사대금 청구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자체 산정 결과 2020년 7월 착공 때보다 공사비가 1645억원이 증가했다는 이유에서다.
시공사와 조합은 ‘착공 이후 물가변동은 반영하지 않는다’는 특약이 문제가 됐다. 조합은 도급계약서에 이러한 특약이 명시된 만큼, 물가변동분을 공사비에 반영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시공사는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이 ‘예상하기 어려운’ 사유로 인해 공사비가 인상된 만큼, 이 특약을 물리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맞섰다.
이 사업장에서만 벌어지는 갈등이 아니다.
현대건설은 지난 1일 부산 범천 1-1구역 조합에 공문을 통해 공사비 인상안을 제시했다. 당초 3.3㎡당 공사비가 539만9000원이던 것을 926만원으로 높여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 결과 도급계약을 맺는 총공사비는 4159억원에서 7342억원으로 71% 이상 늘어난다. 공사 기간도 47개월에서 62개월로 늘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대건설은 해당 공사비는 전문위원회에서 심의할 때 나온 조건을 반영한 사업시행변경 2차 도면을 기준으로 견적 낸 공사비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설계가 확정되면 추후 이를 반영해 추가 증액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조합은 터무니없이 높은 공사비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한 조합 관계자는 “아무리 원자잿값이 올랐다지만 이렇게까지 공사비가 급증하는 사례는 보지 못했다”며 “대책을 수립할 것”이라고 했다.
서울 송파구 신천동 잠실 진주 재건축도 삼성물산과 수개월째 공사비 협의가 안 돼 분양 일정이 밀리고 있다. 시공사가 3.3㎡당 공사비를 660만원에서 889만원으로 올려 달라고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 시공사·조합간 대립·· 물가 반영 못하는 '총액입찰제' 원인
시공사와 조합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양측이 정비사업 도급계약을 맺을 때 ‘총액입찰공사’ 방식을 선택해서다. 설계변경이 잦은 정비사업 특성상, 세부 내용을 일일이 정하기보다 공사비 총액만 합의해서 입찰과 인허가 기간을 단축할 목적에서다. 또 대부분 도급계약서에는 ‘착공 이후 물가변동 배제’ 특약도 포함하고 있다.
원자잿값이나 인건비가 완만히 오를 땐 이 조항이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시공사가 예상 물가상승폭을 생각해 공사비를 산출할 수 있어서다.
그러나 코로나19 등을 겪으며 원자잿값, 인건비 등이 크게 올랐고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인한 금융비용까지 더해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2023년 11월 건설공사비지수 자료를 보면 지난해 11월 전국 주거용건물의 공사비지수는 152.54로 2020년 12월(122.0)과 비교해 24% 상승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건설사들은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반면 대다수 조합은 건설사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모양새다. 계약을 해지한다 해도 새로운 시공사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성남시 산성구역 재개발조합은 2020년 3.3㎡ 당 428만원에 계약을 맺었지만, 지난해 7월 이를 629만원으로 증액하기로 합의했다. 조합원 회의에서 시공사와의 계약 해지를 의결했다가 재선정 공고에 입찰한 시공사가 없자 결국 재협상에 나선 것이다.
이에 최근 4년간은 한국부동산원에 공사비 검증을 요청하는 건수도 급증했다. 2019년에는 3건에 불과했으나, 2020년 13건, 2021년 22건, 2022년 32건, 2023년 30건으로 4년 새 10배나 늘어났다.
하지만 부동산원도 공사비 증액 요구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물가변동이나 금융비용 등은 검증 항목에서 제외하는 경우가 많아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대해 한 건설업계 전문가는 "애초에 총액입찰제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건설사들이 공종별 공사비 인상 근거를 세부적으로 잠은 자료를 잘 내놓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면서 "자료를 받아낸다 해도 이러한 인상 요구가 타당한지 검증할 전문 인력이 국내에는 부족하다"고 강조했다.
한국부동산원이 공사비 검증 결과를 내놓는다고 해도, 시공사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를 강제할 수단도 없다.
정비사업 도급계약은 민간이 주도적으로 맺는 것인 만큼 정부 중재안에 강제력을 두기는 현행법상 쉽지 않기 때문이다.
◆ 정부 대책에 실효성 의문··· 제도 자체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정부는 ‘정비사업 표준계약서’ 개정·배포라는 대책을 내놨다. 시공사 선정 후 계약 체결 전까지 조합에 공사비 세부산출 내역서를 밝혀 공사비 산출 근거를 명확하게 남기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기존에 시공사는 세부 내역을 뺀 채 공사비 총액만 제시한 다음, 도급계약서에 설계변경으로 공사비를 조정할 때도 '상호 협의'라는 모호한 조항만 넣은 관계로, 이후 설계변경 등으로 공사비 증액 시 적정성을 판단하기 어려워 갈등의 원인이 됐다는 점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물가 반영도 현실화했다. 총공사비를 노무비, 재료비 등 세부 항목으로 나눠 항목별 물가지수를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엔 소비자물가지수 변동률을 적용했는데, 음식 의류 등 주로 소비품목이 많아 건설공사 물가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 한계로 꼽혀왔다.
또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건설공사비지수’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표준계약서가 현장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대형건설사 관계자는 “설계도면도 나오기 전 세부내역서를 제출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며 “설계변경이 자주 일어나는 정비사업 특성상 같은 갈등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 정부는 조합과 시공사간의 갈등에 지방자치단체가 개입해 중재하는 제도도 내놓았다. 먼저 광역자치단체에서 정비사업, 건설·토목, 법률, 회계, 행정 등 분야별 전문가 자문단을 꾸려놓고, 갈등을 겪는 시공사나 조합이 조정을 신청하면 기초자치단체가 광역시로부터 전문가들을 파견받아 회의를 열어 중재안을 도출한다.
조합과 시공사 사이 이견과 불신이 큰 상황에서 양측의 주장을 대신 검증하고 공신력 있는 합의선을 제시해 준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 제도도 여전히 맹점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강제성이나 구속력이 없다.
이에 대해 한 조합장은 "제도 취지는 좋은데 강제성이 없다. 시공사가 중재안을 안 받아들이면 조합에서는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또 시공사가 사업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이 제도는 무용지물이 된다. 전문가 검증이 제대로 되려면 공사비를 확인할 수 있는 정확한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지자체가 구성하는 전문가들도 건설업계 관계자이다 보니, 시공사 측과 이해관계가 있어 편향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