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승산부자마을은 김해 허씨가 먼저 세거(世居)한 이래 300년 전부터 능성 구씨가 이거하여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유서 깊은 곳이다. 승산부자마을 한가운데 있었던 지수초등학교는 1921년 5월 9일 개교해 100년의 오랜 역사와 기업가들이 많이 배출된 유명한 학교로 2009년 옛 송정초등학교와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현재 지수초등학교는 위치를 지수면 압사리로 이전하였고, 현 위치는 옛 지수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이 곳의 지수초등학교는 금성(LG, GS) 연암 구인회(1907~1969), 삼성 호암 이병철(1910~1987), 효성 만우 조홍제(1906~1984) 창업주가 다녔던 곳이며, 구태회 LS그룹 창업주,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허정구 삼양통상 회장, 허준구 GS그룹 명예회장, 허완구 승산그룹 회장 등 대한민국을 산업화로 이끈 경제계 거물들이 꿈을 키웠던 곳이다. 이병철 창업주는 의령, 조홍제 창업주는 함안 출신이지만 이곳으로 유학을 와 나이는 다르지만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으며 교정에는 구인회, 이병철, 조홍제 창업주가 심었다고 전하는 부자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경남 진주시 지수면 지수로 482에 위치한 옛 지수초등학교에 걸려 있는 안내문을 여기에 옮겨 적은 것이다.
부자마을이라. 참으로 묘한 대목이다. 해방 이후 기업 창업자들이 대부분 영남지역에서 나온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초등학교 한 곳에 한국을 대표하는 오너들이 밀집해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사연이 이러하니 지난 2018년 7월 10일 한국경영학회에서 진주시를 “대한민국 기업가정신 수도”로 선포한 뒤 지난해 7월 8일에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 진주시와 지수면 승산리 옛 지수초등학교에서 기업가정신 수도 선포 1주년을 기념해 ‘기업가정신 교육센터 설립 및 운영’ 업무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 지역과 관련해서는 구자경 전 LG그룹 명예회장의 글이 있다.
“내가 태어난 승산마을은 승내리의 중심 마을로서 상동(上洞)에는 구씨가, 하동(下洞)에는 허씨가 대를 이어 문중의 번성을 일구어왔다. 예부터 이곳은 천석꾼 만석꾼 부자가 많아서 서울에서도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알았다고 할 만큼 융성함을 누렸던 고을이다. 이름난 산맥이 끊어진 곳에 인물이 많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태백산맥의 허리를 틀어 뻗은 발치와 소백산맥이 끝나는 우단 자락의 진양(선친인 구인회 LG그룹 창업 회장), 의령(이병철 삼성그룹 창업 회장), 함안(조홍제 효성그룹 창업 회장)에서 재계 3인의 출생이 나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전설이 이런 사연에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경남 의령군에 정암루라는 곳이 있다. 여기에는 ‘솥바위(鼎巖·정암)’ 전설이 내려온다. 솥은 밥을 짓는 도구인데 중국에서도 구정(九鼎)이라고 하면 황제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정 바위 물 밑으로는 솥다리처럼 세 개의 발이 받치고 있는데 인근에 큰 부자 3명이 나오는 명당이라는 것이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효성그룹 창업자 조홍제의 생가가 모두 이 솥바위 근처에 있다.
회사 이름을 보면 더욱 그럴 듯한 것이 삼성(三星), 금성(金星), 효성(曉星) 등 별이 세 개나 된다.
강호동양학자 조용헌씨 글을 보면 구한말에 여기를 지나가던 어떤 도사가 이 솥바위를 보고 '반경 30리 이내에서 국부(國富) 3명이 나온다'는 예언을 했다는 것이다.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끔 구(具), 이(李), 조(趙) 세 부자들의 선조들이 묻힌 무덤을 답사하러 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무덤의 자리잡음에서 ‘재벌 탄생’의 기적을 찾기 위해서이다.
이곳을 아우르면서 흐르는 남강 물은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흐른다 해서 역수(逆水)로 불리는데 ‘역(逆)’자 때문인지 반역의 땅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풍수지리에서는 남쪽으로 흐르는 지맥과 북으로 흐르는 수맥이 서로 조화를 이뤄 오히려 부(富)가 융성하다고 ‘역수(逆水)’의 성격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그랬거나 어쨌거나 의령 사람이라고 해서 다 출세한 것도 아니고 지수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모두 떵떵거리는 것은 아닐 테니 이런 이야기들은 호사가들의 뒷담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수초등학교 근처를 찾아 부자의 기운을 얻어가려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한다. 속진에서 재물의 부족함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누리는 사람들보다 분명 많은진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구인회 회장의 능성 구씨는 조선 초중기 때는 대대로 무신집안이었다. 하지만 정조 대에 이르러 구선복이 임오화변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처형당한 뒤 가문의 힘이 많이 빠졌다. 이후 구씨들은 향리에서 교육에 힘쓰거나 작은 벼슬 자리에 오르다 26세손 구인회에 이르러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그룹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구인회 할아버지 구연호는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만들었는데 손자에게 직접 책을 들어 한학을 가르쳤다. 그 때문인지 구씨 집안은 이후에도 아주 엄격한 유교적 전통을 이어간다. 현재 LG그룹의 회장이 된 구광모도 이같은 유교적 전통(장자 상속)의 산물인 셈이다.
구인회 할아버지 구연호 그리고 아버지 구재서는 아들이 장사치 길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을 턱이 없다. 당시만 해도 사농공상의 순서가 엄연했기 때문이다.
구인회는 부친과 조부의 반대를 꺾고 장삿길에 나섰지만 유교적 전통만은 그대로 가문의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그렇게 구씨 집안의 유교적 전통은 밑으로 이어져 간 것이다.
또 구인회가 자손들에게 중요하게 가르친 것 중 하나가 ‘한번 사귄 사람과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진다면 적이 되지 마라’였다. 이런 가르침은 70년 이상 지속됐던 허씨 가문과 동업관계에서도 빛을 발했다. 때문에 구씨와 허씨들이 엄청난 기세로 가지를 뻗어갔음에도 별탈없이 오늘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이다.
구인회는 14세였던 1921년 이웃사촌인 허만식의 장녀 허을수와 결혼을 했는데 사업이 승승장구하던 터에 1942년 5월 장남 구자경을 장가보냈고 3년 뒤에 장손 구본무를 얻었다. 구인회는 24세에 자본금 3800원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몇 번 실패를 거듭했다.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으니 곧바로 승승장구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첫 사업 품목은 포목이었는데 1931년 대홍수를 맞아 가게가 거덜이 났지만 “장마가 길면 오히려 풍년이 들어 살기가 좋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더욱 크게 사업을 벌여 결국 대성공을 했다.
39세 나이로 구인회는 광복 이후 진주를 떠나 부산으로 옮겨 조선흥업사를 설립해 미군정청으로부터 무역업허가 1호 허가증을 받았다고 한다.
훗날 구자경은 자서전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서 이렇게 썼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던 1950년 5월, ‘교직을 그만두고 내 일을 도우라’는 창업 회장의 말씀에 따라 럭키금성에서의 나의 새로운 인생은 시작되었다.
<중략>
병상에서 운명을 앞두고 투병하시던 어느 날 이렇게 나를 위로하시는 것이었다. '너 나를 원망 많이 했제. 기업을 하는 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바로 현장이다. 그래서 본사 근무 대신에 공장일을 모두 맡긴 게다. 그게 밑천이다. 자신 있게 기업을 키워 나가라.' 병상을 지키고 선 나에게 하신 창업 회장의 이 한마디는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내가 그룹을 책임져야 하는 2대 회장으로 취임해 그나마 대과 없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도 하나같이 창업회장의 귀한 가르침 덕분이 아닐 수 없다.”
창업의 흔적은 그대로 손자에게도 이어졌고 곧바로 경영수업이나 다름없었다.
훗날 구본무 그룹회장은 “할아버지(구인회) 손을 잡고 공장 구경을 갔을 때 땀 흘리며 비누와 '동동구리무'를 만들던 직원들이 생각난다"며 "할아버지는 사업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현재 LG 사업틀을 구축했고, 부친(구자경)은 그 사업 기반을 굳게 다지셨다"고 회고했다.